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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미셸 투르니에 「짧은 글 긴 침묵 Petites proses」을 읽고ㅣ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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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된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1924-2016)의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 Petites proses>입니다. 미셸 투르니에는 '로빈슨 크루소'를 재해석한 데뷔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Vendredi ou les Limbes du Pacifique(1967)>으로 주목을 받고 이후 1970년 <마왕 Le roi des aulnes>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 입지를 굳힙니다.

 

문학적인 성공을 거둔 후 1972년부터 미셸 투르니에는 파리 근교 슈아젤의 사제관에서 은둔하며 집필에 전념합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신화, 종교, 철학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독자들로 하여금 게으를 틈 없는 사색을 요구하는 작가입니다. 선입견인지 사진 속 미셀 투르니에의 얼굴에 천주교 사제와 같은 느낌이 묻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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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에는 여덟 개의 큰 주제에 관한 짧은 단상들이 여러 편 수록돼 있습니다. 

 

 

그 아무것도 없음이야말로 내가 볼 때 집의 필수적인 출발점이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알아서 만들어준다. 매일, 매년의 세월이 그 자취를 남겨놓게 되어 있는 것이다. (p13) '고양이와 거북이' _「집」가운데

 

전체 지상 3층 규모의 사제관에서 혼자 생활하는 미셸 투르니에에게 '집'이란 아마도 가장 중요한 글감이었을 듯합니다. 산문집 맨 앞 순서에서 집에 관한 단상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고양이 집사이기도 한 투르니에는 고양이의 단조롭고 평온한 삶을 통해 붙박이 생활의 교훈을 배웁니다. 그렇게 파리 근교 작은 마을에 깊이 뿌리내린 그는 죽는 날까지 44년을 그 '집'에 머물다 갔습니다. 문득 작가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봅니다.  

 

 

 

자물쇠는 닫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 열쇠는 여는 행동을 상기시킨다. 양자는 각기 하나의 부름을, 하나의 소명을, 그러나 서로 반대되는 방향에서 형성한다. 열쇠가 없는 자물쇠는 해명해야 할 비밀이요, 밝혀져야 할 어둠이요, 판독해야 할 암호다. (p20) '열쇠와 자물쇠' _ 「집」가운데 


집안의 어떤 자물쇠도 맞는 열쇠가 없는 것을 보며 마치 심술궂은 누군가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열쇠를 바꿔치기해놓기라도 한 듯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자물쇠와 열쇠로 상징되는 세상 이치를 언급합니다. 예컨대 자물쇠는 얼굴, 책, 낯선 도시, 예술 작품, 별 등이며 열쇠는 돈, 무기, 사람, 교통수단 등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자물쇠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봉사'할 준비만 되면 된다고 말합니다.

 

미셸 투르니에의 사유는 깊이가... 깊... 습니다.

 

 

 

어젯밤은 잘 잤다. 나의 불행도 잠이 들었으니까. 나는 그보다 먼저 일어났다. 잠시 동안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맛보았다. 이윽고 불행도 덩달아 잠이 깼다. 그리고 내게 달려들어 간을 꽉 깨물었다. (p29) '밤이 오면' _「집」가운데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글입니다. 하필 불행은 간을 꽉 깨무는 것일까요. '간이 크다, 대담하다', 뭐 이런 표현이 떠오르면서 불행이란 녀석은 용기를 꺾어놓는 게 주특기인가 생각해 봅니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진다. 과거의 덩치가 점점 커짐에 따라 그 자신은 점점 작아진다. 뒤에 달린 그림자가 너무 무거워져서 걸음을 멈추어야 되는 날이 온다. 그러면 그는 사라져 버린다. (p226) '그림자' _「죽음」가운데

 

우리의 생애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글입니다. 막 출발할 땐 내 앞에 있던 그림자가 점차 내 발 밑으로 오고 이윽고 내 등 뒤로 무겁게 끌립니다. 과거라는 그림자에 묶인 노년기의 삶을 이보다 더 잘 묘사할 수 있을까요. 

 

 

 

암흑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제 나는 알 것 같다. 그들은 내게 찾아와서 내가 자기들 공동체의 일원임을 일깨워준다. 내가 그들의 사람임을, 어쩌면 이미 죽은 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해준다. (p227) '암흑의 교훈' _「죽음」가운데

 

미셸 투르니에는 어린 시절 죽은 친구들과 젊은 시절 잃어버린 친구들 그리고 그저께와 어제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암흑을 이야기합니다. 침묵으로 가득 찬 암흑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합니다.

 

Memento mori.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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