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1951)>으로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 1919-2010)의 대표 단편소설집 <아홉가지 이야기 Nine Stories>입니다. 1953년에 출간된 이 작품집은 J.D. 샐린저가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쓴 서른다섯 편의 중단편 가운데 아홉 편을 모아 엮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수록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전세계에 마니아층을 양산할 만큼 여운이 크게 남 작품입니다. 1948년 《뉴요커》에 발표한 이 단편은 당시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으며 후속 작품들의 근원이 됩니다.
"아뇨, 그냥 그 사람이 그 책에 대해서 묻더라구요. 내가 그 책을 읽었는지 알고 싶어 했어요." (...) "무섭구나. 무서워. 사실 그건 슬픈 일이야. 네 아버지가 지난밤에 말하길..." (p18)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뉴욕에 있는 글래스 부인과 플로리다로 여행을 떠난 딸 뮤리엘의 통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뮤리엘은 '그 남자' 시모어 글래스와 함께 있는데 그의 부모는 계속해서 딸을 걱정하는 말을 쏟아냅니다. 대체 '그 남자'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뮤리엘 아버지가 '그 남자'에 관해 한 말 역시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507호에 투숙 중인 뮤리엘과 '그 남자', 그리고 혼자 목욕가운 차림으로 바닷가에 누운 '그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유리를 더 봐요." 시빌 카펜터가 말했다. "유리 더 봤어요?" "야옹아, 그 말 좀 그만해. 그 말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구나." (p26)
느닷없는 이상한 문장이 등장합니다. "유리를 더 봐요."
주석에 따르면 'See more glass', 그러니까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의 주인공인 시모어 글래스(Seymour Glass)를 은유한 표현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플로리다의 호텔에 투숙 중인 어린 소녀 시빌 카펜터가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문장인데 '그 남자'를 찾는 듯합니다.
"아줌마는 어디 있어요?" "그건 좀 어려운 질문이로구나, 시빌. 그녀는 천 개의 장소들 중 어디에라도 있을 수 있지..." (p28)
어린소녀와 대화하는 시모어 글래스는 꽤나 진지합니다. 시빌이 시모어를 계속 찾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두 눈을 계속 뜨고 있어. 혹시 바나나피시가 있을지 모르니까. 오늘은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이야." (p36-37)
시모어 글래스는 시빌에게 바나나피시 이야기를 해줍니다. 바나나가 잔뜩 든 구멍 속으로 들어가 78개의 바나를 먹어치우고는 뚱뚱해져서 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해 죽고 마는 물고기 이야기인데 당연히 그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시모어 글래스의 마지막 하루를 묘사한 단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작품을 마지막까지 읽은 독자가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오게 하는, 그리고 다시 찬찬히 작품을 읽게 하는 묘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78개의 바나나일까요.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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