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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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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축복받은 집>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1967년생)의 <내가 있는 곳 Dove Mi Trovo>입니다. 2018년에 발표한 소설로 마흔여섯 개의 짧은 이야기들을 옴니버스식으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소설은 주인공 그녀에 관해서는 이름도, 사는 장소도, 직업도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라는 표제를 따라 그녀가 존재하는 46개의 공간들만이 무심히 펼쳐질 뿐입니다. 

 

그녀가 머물고 그녀가 지나치는 모든 장소를 조용히 따라가며 함께 사색할 수 있게 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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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흔네 살에 목숨을 잃었다. 바로 여기 이 보도, 잡초가 돋아난 담벼락 옆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래서 묘비가 담벼락 밑 행인이 지나는 발치에 있는 거라고 상상해 본다. (p15) _'보도에서' 가운데

 

주인공은 굽어진 오르막길을 지나며 담벼락 아래 자리잡은 묘비를 발견합니다. 이 길에서 사고를 당한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 추측하며 묘비 옆에 붙어 있는 고인의 어머니가 손수 쓴 메모를 읽어봅니다. 보도를 걷다 잠시나마 걸음을 멈추고 시간을 내어 아들의 묘를 봐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입니다.   

 

2년 전 콜롬비아 보고타 중앙공원묘지를 방문했을 때 묘비를 보며 돌아가신 분들의 사망 당시 나이를 세어보던 제 모습이 떠오르네요.  

 

 

이곳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 난 이 안에 정착할 수가 없다. 동료들은 날 무시하려 하고 나도 그들을 무시한다. 날 뻣뻣하고 다가가기 쉽지 않은 사람으로 보는 모양인데, 글쎄, 우리는 가까이 언제든 금방 찾아갈 수 있는 곳에 머물지만 난 홀로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p22-23) _'사무실에서' 가운데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녀가 일하는 사무실은 어딘가 편치 않은 장소입니다. 마치 아웃사이더처럼, 잠시 있다 갈 사람처럼 정을 붙이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료들 역시 같은 감정으로 그녀를 대합니다. 도저히 연결될 틈이 보이지 않는 외떨어진 고리입니다.  

 

 

 

잠이 점점 가늘어지며 날 떠난다. (p136) _'침대에서' 가운데

 

그녀의 집은 아마도 차도 옆에 위치해 있는 듯합니다. 집 아래로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드는 그녀는 밤이 깊어 지나가는 차도 없이 고요에 잠기는 시간이면 잠에서 깹니다. '어둠의 시간'에 그녀는 깨어나 어둡고 또렷한 생각을 붙잡습니다.

 

한밤의 고요함과 명징함, 반갑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 손님입니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날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p189-190) _'아무 데서도' 가운데

 

그녀는 자문합니다. 그녀가, 우리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물 어떤 곳이 있느냐고. 이 세상에 오던 날부터 우리는 아웃사이더의 숙명을 받아든 것이 아닐까라고 그녀의 질문에 조심스레 답해봅니다. 


2025.3. 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의 「축복받은 집」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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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ilovejesu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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