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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정현종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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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시가 가슴 깊이 와닿지 않아 가끔 좋은 시인의 시집을 제 수준 가늠 차원에서 읽어보곤 합니다. 인생의 연륜과 문학적 감수성이 어느 정도 채워져야 시가 좋아질까요.   

 

이번에 고른 시집은 정현종(1939년생) 시인이 등단 50주년을 맞아 2015년에 발표한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입니다. 2009년 출간된 <섬>이라는 시선집으로 정현종 시인을 처음 알게 됐는데 직접 그린 삽화와 손글씨에 반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림자에 불타다>에는 58편의 최근작들이 수록돼 있는데 일흔이 넘은 시인의 깊이를 절반이라도 읽어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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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면 / 가는 곳마다 거기서 / 나는 사라졌느니, / 얼마나 많은 나는 / 여행지에서 사라졌느냐. / 거기 / 풍경의 마약 / 집들과 골목의 마약 / 다른 하늘의 마약 / 그 낯선 시간과 공간 / 그 모든 처음의 마약에 취해 / 나는 사라졌느냐. / 얼마나 많은 나는 / 그 첫사랑 속으로 / 사라졌느냐. _「여행의 마약」

 

취하기 쉽고 중독되기 쉬운 여행의 마약을 정현종 시인께서도 이야기 하시네요. 취해서 사라진 나는 그곳에 남아있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여행, 여행은 떠나기도 전에 벌써 돌아오고 싶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느림은, / '진짜'에 이르기 어려워 / 그건 정말 어려워 / 미루고 망설이는 모습인데 / 앎과 느낌과 표정이 / 얼마나 진짜인지에 민감할수록 / 더더욱 느려지는 이 느림은... _「이 느림은」

 

<그림자에 불타다> 첫 번째로 실린 시 「이 느림은」 입니다. 이 시를 읽고 이 시집을 읽기로 했죠. 민감함과 느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기다린다, 익어 떨어질 때까지, / 만사가 익어 떨어질 때까지, / (될성부른가) / 노래든 사귐이든, / 무슨 작은 발성이라도 / 때가 올 때까지, / (게으름 아닌가) / 익어 / 떨어질 / 때까지. _「익어 떨어질 때까지」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ㅡ / 욕망은 준비 없이 움직이므로. / 시작이 그러했듯이 / 평생의 일들은 한 번도 / 제대로 준비된 적이 없다. / 물론 또한 / 경황없이 떠날 것이다. _「준비」

 

준비 없이 왔다가, 준비 없이 살고, 경황없이 떠나는 삶, 인생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표현입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시도할 때 너무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하지 말라는 허용으로도 들립니다. 어차피 모두가 처음 사는 인생에서 제대로 된 준비라는 말은 그 자체로 난센스 일수도 있겠습니다. 

 

이 시집이 좋았던 이유 가운데 시집 뒤표지에 적힌 시인의 한 문장이 있습니다. 

 

"앞에서 노래했으니 이제 입을 닫는 게 좋겠다." _정현종

 

어쩜 이런 위트 가득한 여운을 책의 매듭으로 쓸 수 있을까요. 정현종 시인께 다시 한 번 반합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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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섬: 시인의 그림이 있는 정현종 시선집ㅣ정현종 시인 정현종 시인의 그림이 같이 수록된 시선집 입니다. 시인은 1939년생으로 이 시선집은 그가 70세가 되던 2009년 출간한 시집입니다. 연필로

2020ilovejesu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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