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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계단 위의 여자」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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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1995)>로 잘 알려진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 1944)의 2014년 작품 <계단 위의 여자 Die Frau auf der Treppe>입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그림 <에마, 계단 위의 나체 Ema-Akt auf einer Treppe(1966)>를 모티브로 쓰였는데 구글링 해보면 소설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림 「계단 위의 여자」와 동일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림에 묘한 분위기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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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위의 여자>의 주인공은 법률회사의 시니어 대표 변호사로 탄탄한 성공가도를 걸어온 인물입니다. 40여년 전 초임 변호사 시절 「계단 위의 여자」라는 그림에 얽힌 사건을 맡으며 한 여자를 알게 됩니다. 바로 그림 속 여인이자 주인공이 사랑하게 된 이레네입니다. 이레네는 부유한 기업가인 군트라흐의 전 부인으로 그림은 화가 카를 슈빈트가 그렸습니다. 이 두 남자 사이에 이레네와 그녀의 그림을 놓고 다툼이 일어나고 이레네는 변호사인 주인공의 도움으로 그림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자신을 찾아.

 

당신도 언젠가 그 그림을 보게 될 것이다. (p9) _첫문장

 

소설은 40년 전 사라진 그림 「계단 위의 여자」가 호주 시드니 아트갤러리에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화가가 된 카를 슈빈트의 잃어버린 그림이 불쑥 나타나면서 세간의 관심이 쏠립니다.

 

주인공은 「계단 위의 여자」 이레네를 떠올립니다.

 

 

두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오지 않자, 나는 늦을 수 있는 이유를 하나 생각해 냈고, 네 시간이 지난 뒤에는 또 하나를 더 생각해 냈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하나하나 만들어내면서, 그녀에게 혹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두려운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p93)

 

40년 전, 주인공은 이레네의 요청으로 그녀가 「계단 위의 여자」 그림을 훔쳐 도주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의뢰인을 배신한 것이죠. 그러나 결국 그 역시 그녀로부터 잊히게 되고 40년이 흘러 출장지에서 우연히 그림을 만난 것입니다. 

 

 

"너를 이곳으로 유인할 일이 뭐가 있겠어? 나는 패티와 카를을 한 번 만나보려고 한 거야. 네 생각은 하지 않았어." (p172)

 

호주의 외진 마을에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이레네는 군트라흐와 슈빈트를 '유인'하기 위해 그림을 세상에 내보낸 것입니다. 아쉽게도 유인 대상에 주인공은 없습니다. 그림을 처음 본 순간 피사체와 사랑에 빠졌고 의뢰인을 배신하면서 까지 이레네의 도피를 도운 주인공이었지만 이레네에게 그는 변호사 그 이상도 아니었나 봅니다. 안타깝네요.

 

 

"말했잖아. 난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다고." / "네 삶을 상상해 보는 것뿐이야. 케이스 속에 들어 있는 삶을. 그런 케이스 속에서 일생을 산다면 바깥세상은 정말로 클리셰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p290)

 

안정적인 삶을 살아온 주인공에게 이레네는 '케이스 속의 삶'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나름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세상과의 소통에 노력하고 살아온 그였기에 그 표현이 당황스러웠으나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0년 전 이레네는 바로 그 안전한 케이스 속 삶을 스스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이기 때문이죠.   

40년 전 이레네가 주인공을 케이스 밖으로 이끌었다면, 혹은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준다면, 변호사로서의 커리어와 명성, 사랑하는 가족과 안정적인 일상을 버리고 그녀를 따라나섰을까요. 음. 어쩌면 주인공은 실존하는 이레네가 아니라 「계단 위의 여자」 속 안전하고 완벽한 케이스 속 이레네를 사랑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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