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1951)>으로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 1919-2010)의 대표 단편소설집 <아홉가지 이야기 Nine Stories>입니다. 1953년에 출간된 이 작품집은 J.D. 샐린저가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쓴 서른다섯 편의 중단편 가운데 아홉 편을 모아 엮었습니다.
수록된 작품은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 「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 「웃는 남자」, 「작은 보트에서」,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 「드 도미에 스미스의 청색 시대」, 「테디」까지 9편인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으로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를 꼽고 싶습니다.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는 1950년 《뉴요커》에 발표한 단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무렵을 배경으로 주둔지에서 만난 어린 소녀와 미군 상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은 화자인 주인공 남자가 영국에서의 결혼식 초대장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남자는 아내의 어머니가 방문할 날짜와 겹쳐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신부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소설 속 두 개의 에피소드를 풀어냅니다.
살맛을 잃은 듯한 두 눈을 가진 열세 살쯤 먹어 보이는 아이였다... 꼬마 숙녀는 자기의 노래 실력을, 아니면 그냥 그 시간과 장소를 약간 지겨워하는 듯 보였다. (p178)
첫 번째 에피소드의 배경은 1944년 영국 데번입니다. 폭풍우가 치는 오후에 훈련을 마친 미군 병사인 주인공은 마을로 혼자 산책을 하게 되고 교회에서 어린이 합창단 리허설을 우연히 보게 됩니다. 합창단 속에서 눈에 띄는 한 소녀를 발견하는데 노래 실력이 탁월한 13살 소녀 에스메입니다.
"내가 여기 온 건 순전히 아저씨가 극도로 외로워 보였기 때문이에요. 아저씨는 지극히 예민한 얼굴을 갖고 있어요." (p186)
교회에서 나와 비를 피해 카페에 들어간 남자는 그곳에서 다시 에스메와 동생, 가정교사 일행을 마주칩니다. 혼자 있는 남자가 외로워 보인다며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에스메는 품행이 바르고 나이보다 성숙한 소녀입니다. 그리고는 이모의 말대로 자신이 지독하게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좀 더 동정심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훈련시키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둘의 대화 속에 남자는 군대 가기 전 단편소설을 썼으며 에스메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고아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특히 에스메의 아버지는 복무 중 북아프리카에서 사망한 군인이었는데 에스메는 아버지의 유품인 군용 손목시계를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 아저씨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이야기를 써준다면 나는 무척 의기양양해질 거예요. 나는 탐욕스런 독자거든요." "나는 비참함에 대한 이야기들을 좋아해요." (p194)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에스메는 남자에게 자신만을 위한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참함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덧붙입니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에스메는 남자에게 글쓰기를 포함한 모든 재능을 그대로 지닌 채 전장에서 귀환하길 바란다는 어른스러운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전쟁ㅡ아마도 남자가 참전했을ㅡ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스스로를 'X 상사'라고 칭합니다. X 상사는 독일 바이에른에 주둔하고 있으며 전쟁 후 신경쇠약과 약한 정신질환 증세를 보입니다.
모든 재능을 그대로 지닌 채 전쟁을 통과할 수 있었던 젊은이는 아니었고, 그래서 한 시간이 넘도록 같은 단락을 세 번씩 읽어왔으며, 이제는 심지어 문장들에까지 그 짓을 하고 있었다. (p202)
어느 날 X 상사는 자신에게 온 뜯지 않은 편지 꾸러미를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서 약 1년 전 데번에서 온 소포를 발견합니다. 그 속에는 에스메의 편지와 에스메 아버지의 유품인 군용 손목시계가 들어있습니다.
남자는 더없이 자비로운 에스메의 소포 덕분에 다시금 일어설 힘을 얻습니다. 자신의 재능을 되찾았고 에스메의 부탁대로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라는 걸작을 남긴 것으로 봐도 되겠지요. 시작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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