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오규원(1941-2007)의 만년기 작품 54편을 모아 엮은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입니다. 2005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오규원 시인의 '날(生) 이미지 시'라는 본인의 시론으로 오롯이 형상화한 시편들이 담겨있습니다.
'날(生) 이미지 시'라는 것은 나(주체) 중심의 관점을 벗어나 낱낱의 물물(物物)의 관점에서 그저 서로를 바라본다는 개념이라고 합니다. 시인에 의해 다듬어진 시가 아니라 세상 만물이 날것 그대로 살아 있는 이미지로서 그 자체로 시가 된다는 설명입니다.

붉은 양철 지붕의 반쯤 빠진 못과 반쯤 빠질 작정을 하고 있는 못 사이 이미 벌겋게 녹슨 자리와 벌써 벌겋게 녹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리 사이 퍼질러진 새똥과 뭉개진 새똥 사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또닥 또닥 소리를 내고 있는 봄비와 또닥 또닥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봄비 사이 _「양철 지붕과 봄비」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소개문에서 오규원 시인은 '물물(物物)과 나란히 앉고 또 나란히 서서 한 시절을 보낸 인간인 나의 기록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소개문에 바로 뒤에 이어지는 첫 번째 시가 「양철 지붕과 봄비」인데 마치 1:1로 이 시를 소개한 듯 잘 어울리는 문장입니다.

나는 갠지스 강의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 아이를 기다리며 졸았다 강에서는 가끔 시체가 / 떠내려가기도 하고 죽은 아이를 / 산 여자가 안고 가기도 하고 (...) // 시체를 태우다 남은 나무토막들이 떠내려와 / 사람의 등을 두드리기도 했다 (...) _「사진과 나」가운데
인도 갠지스 강의 풍경을 묘사한 시 「사진과 나」를 읽다 보면 그곳 풍경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떠내려가던 시체가 발에 걸리고 새는 시체 위에 앉아 깃털을 고르기도 합니다. 시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불쾌한 표정을 짓거나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별한 기운이 있는 곳, 왠지 그곳에서는 그래선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지 않아도 나의 몸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 눈송이가 몇 날아온 뒤에 도착했습니다 / 편지지가 없는 편지입니다 / 편지봉투가 없는 편지입니다 / 언제 보냈는지 모르는 편지입니다 / 발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 수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 _「돌멩이와 편지」
누가 보냈는지, 누구에게 보낸 건지, 언제 보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분명 도착했습니다. 「돌멩이와 편지」라는 시도 너무너무 아름답네요.
유튜브 영상을 통해 오규원 시인을 소개해준 박문호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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