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변호사이자 작가인 카르스텐 두세(Karsten Dusse, 1973)의 데뷔작 <명상 살인 Achtsam morden>, 부제는 '죽여야 사는 변호사'입니다. 2019년 발표한 소설로 출간 직후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습니다. 다소 자극적인 표제라 몇 차례 그냥 지나치다가 첫 문장에서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읽어봅니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결코 난폭한 사람이 아니다. (p9)
이 첫 문장에서 주인공은 가벼운 심리적 문제를 가졌거나 혹은 치료 불가능할 만큼 중증의 정신 질환자가 아닐까 상상해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자신이 42세에 첫 살인을 했으며 이후 6건이 추가되었다고,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업무환경에 비춰보면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태연히 서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명상 살인>의 주인공은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형사법 전문 변호사 비요른 디멜입니다. 비요른은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변호하며 분노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고 밀려드는 업무 스트레스와 수많은 인간관계에 시달리며 겨우 일상을 버텨내고 있습니다. 아내와는 마주치면 싸우고 어린 딸은 얼굴 볼 겨를도 없습니다.
결국 아내의 강권으로 요쉬카 브라이트너의 명상센터를 찾아갑니다.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않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강박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냥 하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자다. _요쉬카 브라이트너 '추월 차선에서 감속하기-명상의 매력' (p23)
<명상 살인>은 전체 37장으로 이루어지는데 각 장 도입부에 소설 속 명상 지도자 요쉬카의 '조금 이상한' 저서의 어록이 한 토막씩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서의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살인자의 서사를 담고 있지만 범죄소설이라기 보다는 블랙코미디로 분류되는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책 초반부에 특히 웃음 포인트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사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에 놀라곤 했다. 스스로 깨달을 정도가 되었다는 건 예민한 아내가 이미 먼저 알아챘다는 의미였다. 아내는 내가 언젠가 이런 삶을 견딜 수 없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p30)
흉악한 범죄자들을 변호하고 사악한 증인들을 심문하는 동안 비요른 스스로도 변해갑니다. 한계상황에 몰린 비요른은 이 원흉들이 사라지길 바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실행에 옮깁니다.
멍청이들에게 발목이나 잡히자고 짜증 나는 의뢰인을 토막 낸 게 아니다! 이렇게는 안 된다. 요쉬카 브라이트너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선 잠시 벗어나라고 조언했다. 방에서 나가 호흡 연습이나 산책을 하고... (p149)
어딘가 단단히 잘못 된 듯한 '자기 합리화용' 명상을 함으로써 무척 평온하게 여러 건의 범행을 저지릅니다.
우리 근심의 원인은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다. 벌어진 일을 머릿속에서 정리할 때 우리는 겁에 질린다. 어떤 사건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_요쉬카 브라이트너 '추월 차선에서 감속하기-명상의 매력' (p72)
비요른이 다니는 명상센터의 요쉬카 브라이트너 저서에는 우리에게도 꽤 도움이 되는 어록도 있습니다. 물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문구도 수두룩하지만요.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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