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 The Tartar Steppe」을 읽고
이탈리아의 소설가 디노 부차티(Dino Buzzati, 1906-1972)의 대표작 <타타르인의 사막 Il Deserto dei Tartari, The Tartar Steppe>입니다. 1940년 발표한 작품으로 이탈리아 환상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꼽힙니다. 디노 부차티는 <60개의 이야기>라는 단편집으로도 유명한데 <타타르인의 사막>에 앞서 이 단편집을 먼저 접한 저로서는 그의 신선하고 매력적인 이야기에 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고로 부차티는 스스로를 '기자와 작가를 취미로 하는 화가'라고 소개할 만큼 다방면에 재능이 인물로 보르헤스, 카뮈, 칼비노, 쿳시, 마텔 등이 추천하는 20세기 이탈리아의 중요한 작가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J.M. 쿳시는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영감을 받아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썼다고 합니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가상의 적군 타타르족의 침략을 기다리는 바스티아니 요새, 그곳의 조반니 드로고 중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전체 30장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입니다. 설정만 보아도 어딘가 부조리하고, 그럼에도 심오한 이야기가 숨어있는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막 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조반니 드로고 중위는 <타타르인의 사막>이라 불리는 넓은 평원을 마주한 북부 바스티아니 요새로 파견됩니다.
넋이 나간 드로고는 요새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사람이 닿을 수 없으리만치 저토록 세상과 동떨어진 저 고독한 성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저곳엔 어떤 비밀들이 숨어있을까? (p.13)
첫 파견지, 바스티아니 요새에 도착한 드로고 중위는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듭니다. 젊은 장교로서 품어온 자부심, 편안한 집, 유쾌한 친구들, 그동안 자연스레 그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모든 것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요새에는 전설처럼 전해지는 실체가 모호한 소문이 있습니다. 언젠가 '타타르족'이 쳐들어 올 것이며 대비해야만 한다는, 그 소문을 붙잡고 드로고는 요새에 마치 볼모로 잡혀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이 미지의 세계 바스티아 요새에서 드로고 중위에게 남은 것은 오직 삶과 죽음에 대한 이미지 외엔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그 환상 같은 소문을 붙잡지 않고서는 요새에서의 단조롭고 고독한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한때 간직했던 희망과 전쟁의 환상,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올 적에 대한 기대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났다. 도시의 문명사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지금, 그러한 꿈들은 유치한 광기처럼 보였다. (p.206)
<타타르인의 사막>이 집필되던 시기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집권한 사회였습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분위기 속에 적이 누구이며 적이 실존하긴 하는지도 모른 채 부지불식간에 부조리한 세계에 붙잡혀버린 사람들의 불안은 이 책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바스티아니 요새에 파견된 초임 장교 드로고의 삶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새로운 생각이, 분명하고 무서운 한 생각이 떠올랐다. 죽음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깨진 마법처럼 멈춘 듯 보였다. 세상은 무감각한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시계는 부질없이 움직였다. (p.277)
시대에 갇힌 인간의 운명이란 얼마나 무력한가.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했다는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주인공 치안판사 '나'의 치욕적인 운명 역시 드로고 중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2024.1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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