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잘못 걸려온 전화」를 읽고
헝가리 출신 스위스 소설가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1935-2011)의 단편집 <잘못 걸려온 전화 Les Faux Numéro>입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성장했고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반체제 운동을 하던 남편과 갓난아기를 안고 고국 탈출합니다. 이후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외롭고 궁핍한 삶을 이어가다 소설을 쓰기 위해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저자의 대표작이기도 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3부작을 5년여에 걸쳐 펴냅니다. 이 작품은 전쟁과 혁명의 혼란 속에 파괴되는 인간성을 그린 작품으로 국내외에 작가로서 유명세를 얻는 계기가 됩니다.
이 책 <잘못 걸려온 전화(원제: C'est égal, 아무튼)>는 저자가 망명 후 수년간 쓴 25편의 짧은 소설을 모은 것으로 200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에 수록된 스물 다섯편의 단편은 각기 다른 주인공과 배경을 다루고 있지만 읽고 난 후 여운은 서로 닮아있습니다. 좌절, 소외, 결핍, 외로움, 고뇌, 부조리함, 허무, 고통, 대체로 인간의 어두운 면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암울한 짧은 글들이 그러에도 불구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삶의 본질에 가까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한 편당 짧게는 3페이지, 길어도 10페이지를 넘지 않고 단편 소설이라기보다는 단상에 가까운 작품도 있습니다.
너를 두렵게 하고 너를 해칠 수 있는 유일한 건 인생이라는 것,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p.112) _「영원히 돌아가는 회전열차」
「영원히 돌아가는 회전열차」 속 화자는 불특정 청자에게 일방적으로 말합니다. 태어나기를, 그리고 죽기를, 그 외에 많은 것을 두려워하는 청자에게 전지전능해보이는 화자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연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제 내게는 희망이 거의 없다. 전에는 무엇인가를 찾아다니고, 끊임없이 움직였었다. 나는 인생이 아무것도 아닐 수밖에 없더라도, 인생은 그 무엇인가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다가 그것을 찾아 나서기도 했던 것이다.(p.140) _ 「나는 생각한다」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 은퇴했다. 나는 위대한 작가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내가 일단 나의 책을, 나의 소설을 쓰기만 하면....(p.45) _「작가」
「작가」라는 작품 속 주인공은 위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공무원직을 버리고 세상으로부터도 떠났습니다. 작품을 쓰지 않았지만 그는 '작가'입니다. 자기에게 꼭 맞는 주제와 그 시기를 기다립니다. '작가'는 고독, 침묵, 공허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이 과정 역시 위대한 작가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 여깁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거나, 있어도 기억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나만의 집으로. 사실 나의 집이란 존재한 적이 없었다.(p.21) _「나의 집에서」
「나의 집에서」에서 말하는 '집'은 물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징을 의미합니다. 온전히 나와 일치되는 어떤 지점,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심리적 상태, 그러한 곳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의 크기가 이 작품 속 화자에게는 '집'에 대한 물리적 거리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2024.1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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