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 1권, 2권을 읽고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가 2011년 발표한 소설 <프라하의 묘지 Il Cimitero di Praga>입니다. 권력의 거짓말과 모함, 그에 따른 정치적 음모론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설로 1권, 2권 각각 4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역사학자, 건축학자이며 그것을 통해 정치와 사회 문화를 비평하는 박학한 지식인으로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프라하의 묘지>는 그의 일생동안의 연구와 실천을 집약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프라하의 묘지>는 출간 즉시 유럽 각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며 화제를 불러일으킵니다.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은 19세기 초, 1830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출신 시모네 시모니니입니다. 열악하고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 시모니니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증오합니다. 그가 사랑하는 건 오직 맛있는 음식뿐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런 시모니니는 소설 속에서 악랄함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이렇듯 원한을 품고 있다면, 그건 하나의 내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런 깨달음을 철학자는 어떤 식으로 설파했던가? 오디 에르고숨(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 _본문 가운데
소설 도입부에서부터 시모니니는 유대인, 예수회, 프리메이슨, 여자 등에 대한 증오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 남의 기억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시모니니는 갑자기 자기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고, 어떤 사람이 그런 시모니니를 관찰하고 있었다. _본문 가운데
어느 날 기억상실로 시모니니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고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시모니니의 정신과 주치의가 그 유명한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로 설정되어 있는데 프로이트는 '기억을 더듬어 가다가 진정 고통스러운 대목에 이르게 될 것이며, 그래야만 갑자기 많은 것을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린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훌륭한 처방을 내려줍니다.
시모니니의 일생은 자신의 일기를 통해 조금씩 재구성되기 시작하고 프로이트 박사가 말한 '진정 고통스러운 대목'에까지 이릅니다.
어떤 음모를 폭로하는 문서를 만들어서 팔아먹으려면 독창적인 내용을 구매자에게 제공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구매자가 이미 알아낸 것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 음모론의 보편적인 형식이 빛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_본문 가운데
음모론, 쉽게 쓰는 말인데 정확한 정의가 궁금해서 찾아봅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나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다고 여기며 유포되는 소문'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음모론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의 통찰이 빛을 발하네요.
개인적으로 <프라하의 묘지>를 읽으면서 또 다른 시각을 하나 얻습니다. 그쪽에는 더는 새로운 게 없을 것이라고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말이죠. 그리고 음모론의 숨은 뜻에 관해서도.
이 소설은 19세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많은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작가 후기에 따르면 시모네 시모니니는 콜라주 기법의 산물이고 소설에서 그가 행한 일들은 실제 여러 사람에 의해 행해진 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프라하의 묘지>는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굳!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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