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을 읽고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e de Sousa Saramago, 1922-2010)의 1982년 작품 <수도원의 비망록 Memorial do convento>입니다. 국내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눈먼 자들의 도시(1995년)>와 <눈 뜬 자들의 도시(2004년)>로 잘 알려진 작가인데 <수도원의 비망록>은 <눈먼 자들의 도시>와 함께 1998년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국내에 소개됩니다. 노벨 문학상의 파워입니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중 유일한 러브스토리입니다. 18세기 포르투갈의 대규모 공사인 마프라 수도원 건립을 배경으로 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계급 격차, 그 속에서 소설 전체 스토리를 끌어가는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애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녀의 딸 블리문다는 마녀재판에서 전쟁에서 왼팔을 잃은 발타자르와 우연히 마주칩니다. 곧 화형을 당할 엄마를 발치에 두고 블리문다는 '저기 우리 엄마가 있어요.'라고 건조한 한 마디를 남긴 뒤 옆에 서 있는 발타자르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성경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를 만나 씨름할 때 천사가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후에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 역시 블리문다를 만남으로써 발타자르가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 바르톨로메우 신부의 선언으로 부부가 됩니다.
하늘을 날겠다는 계획을 가진 바르톨로메우 신부는 발타자르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주저하는 그에게 하나님 역시 오른손 밖에 없으시지만ㅡ성경에서 늘 오른손, 오른쪽만 나오는 것을 이유로ㅡ세상을 지으셨다며 용기를 줍니다. 발타자르와 블리문다는 바르톨로메우를 돕기로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성경에 하나님의 왼팔, 왼손, 왼쪽에 대한 언급은 없네요.
천국은 하나의 통일된 교회입니다. 왜 저희는 이 땅에 교회와 수도원을 짓고 있는 것일까요? 우주가 언제나 교회인 동시에 수도원이며, 믿음과 순종의 공간이며, 피난과 자유의 공간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_본문 가운데
18세기 포르투갈의 군주 주앙 5세 시대에 진행된 마프라 수도원 건립에는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고 그들은 고된 노동으로 고통받고 그럼에도 늘 빈곤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이것을 모른채하고 호의호식합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 인부들을 기억하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인부들의 삶을 하나하나 세세히 살펴볼 수는 없다.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름을 기록에 남겨 놓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이 글을 쓰는 유일한 이유이다. _본문 가운데
군주들의 삶, 그들이 이룬 업적, 그들이 세운 거대한 기념물들, 그것들에 대해 우리는 배우고 기억하지만 정작 그 일을 직접 해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들이야 말로 진정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넌지시 말합니다.
발타자르와 헤어지게 된 블리문다는 믿었던 신부의 추악한 면을 보게 되고 9년이 넘는 세월을 남편 발타자르를 찾아 광인처럼 떠돌며 살아갑니다.
집을 나섰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밤이 두렵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어둠보다 더 어두운 밤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_본문 가운데
어두워지는 밤, 블리문다는 발타자르를 찾아 집을 나섭니다. 캄캄한 어둠보다 더 어두운 블리문다 마음속 어둠은 18세기 포르투갈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 보입니다. <수도원의 비망록>이라는 제목처럼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블리문다가 어머니와 발타자르를 만났길 바랍니다.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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