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페렉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읽고
미술업계와 미술애호가, 미술작품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담긴 작품입니다.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1936-1982)의 1979년 작품,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Un Cabinet d'amateur>입니다. 이 책은 1978년 출간된 <인생사용법>의 속편으로도 불리는데 역자후기에 따르면 페렉 역시 자신의 역작 <인생사용법>과 쉽게 작별하기 어려워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조르주 페렉은 오랫동안 화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살았으며 그림 그리기는 늘 그의 버킷리스트의 한 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덕에 화가와 그림은 페렉의 작품 소재로도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이 책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부제가 '그림 이야기'일만큼 그림에 대한 페렉의 애착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화가 하인리히 퀴르츠의 작품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 1913년 대중에 공개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그림은 방 안을 가득 채운 명화들 앞에 앉은 부유한 미술애호가 헤르만 라프케를 그린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관람객을 단숨에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전시회 폐막을 일주일 남겨두고 어느 관람객이 그림에 먹물을 뿌리면서 전시회는 엉망이 돼버립니다.
이 장면은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결말에 대한 복선 역할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미술업계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속에는 첫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복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림 속에 그 그림이 있고, 그 그림 속에 다시 또 그 그림이 있는 식이죠. 전시회 카탈로그에서는 이러한 작품의 특성에 대해 "연속되는 반사 유희와 점점 더 세밀해지는 반복이 만드는 마법적인 매력"이라는 그럴싸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전시회 이후 한 미학 잡지에 레스터 K. 노박이라는 학자의 논문 「미술과 반사」가 실립니다. 이 논문에 미술애호가에 대한 통찰이 드러나는데 16세기말에서 19세기 중반까지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일종의 개인 전시실(Cabinet)을 소유하고 거기에 자신이 수집한 예술품이나 고상한 취향의 물건을 두어 부를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노박은 관람객을 극도로 격앙시킨 모사화와 모사화 사이의 미세한 차이들이야말로, 예술가의 우울한 운명에 대한 최후의 표현일것이라고 주장했다. _본문 가운데
경매에서는 사실상 그림 자체보다 명성 있는 작가의 서명과 호기심 어린 주제가 더 많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실제로 이 그림은 거장의 작품보다는 재미있는 여인숙 간판을 연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만 달러 고지를 가볍게 넘어섰다. _본문 가운데
어느 날 헤르만 라프케가 시신으로 발견되고 그로부터 몇 달 뒤 라프케 컬렉션 경매가 열립니다. 당연히 그림 속 작품들의 원작에 대한 기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죠.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작품 끝부분에서 모든 매듭이 한꺼번에 풀리듯 클라이맥스가 펼쳐집니다. 이것도 거짓, 저것도 거짓, 여기도 가짜, 그것도 가짜, 흥미진진한 결말입니다. 1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이야기 속에 이렇게 밀도 높고 흥미로운 서사를 담아낼 수 있다니, 평론계에서 페렉을 천재 작가로 부르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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