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라면을 끓이며ㅣ김훈 Kim Hoon, 산문집 (문학동네)
2001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칼의 노래>의 저자, 김훈(1948) 작가의 산문집입니다. 비 오는 날엔 산문집이나 시집이 잘 어울리는데 오늘 아침부터 비가 내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산문을 한 권 골라 읽습니다. 기자나 논설위원 출신 작가의 글은 쌀쌀맞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고 비판적인 시각이 기본적으로 깔려있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입니다. 김훈 작가 역시 오랜 기간 밥벌이를 위해 언론사에서 일한 이력이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작가의 말'을 먼저 들춰봅니다. 소설과 달리 산문은 오롯이 작가의 속 이야기를 하는 글이라 이 책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향하여 나는 오랫동안 중언부언하였다... 낮고 순한 말로 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소망으로 몇 편의 글을 겨우 추려서 이 책을 엮는데 또 하나의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를 나는 걱정한다.
평생 글을 쓰며 살아온 저자의 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겸손한 듯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책임감을 세 개의 짧은 문단에 담아뒀습니다. 문장을 발견하기 위해 고투하며 살아왔을 김훈 저자께 그러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글을 세상에 내보내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책 <라면을 끓이며>는 절판된 산문 <밥벌이의 지겨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바다의 기별>에서 추려낸 글과 이후 새로 쓴 원고 일부를 합쳐 엮은 책입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산문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제목부터 뭔가 '진리'스러울만큼 공감이 가네요.
목차를 보면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밥', 2부 '돈', 3부 '몸', 4부 '길', 5부 '글' 입니다. 페이지를 넘기며 혼자 킥킥대는 일이 잦습니다. 뭐죠? 뭔가 웃긴 이야기는 아닌데, 자조도 아니고, 김훈 작가의 산문에는 웃픈 어떤 것이 있습니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 씨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거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먹이시느니라"라고 하셨다지만 나는 이 말을 믿지 못한다. 하나님이 새는 맨입에 먹여주실지 몰라도 인간은 맨입에 먹여주시지 않는다.. 밥벌이는 밑도 끝도 없다..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부분에서 다들 와닿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땀 흘려야 먹고사는 인생의 고단함. 우리 삶의 목표가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지만 밥벌이를 쉴 수도 없고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밥벌이의 대책 없음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전직 논설위원 출신의 작가님 한 분과 잠시 같이 일한 적이 있는데 그분의 글에서도 꼭 김훈 작가와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시니컬한 듯 하지만 다정한 인간미가 있는, 사람 냄새나는 분일 것 같습니다.
길은 생로병사의 모습을 닮아 있다.. 길은 이곳과 저곳을 잇는 통로일 뿐 아니라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모든 구부러짐과 풍경을 거느린다. 길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에 가깝다.. (중략)
'옛길'은 길의 모든 풍광과 구부러짐을 그대로 거느리고 빈 산맥 속으로 뻗어있고, 자동차들은 그 아래 터널 속으로 몰려들어갔다. 이곳과 저곳만이 있고 그 사이의 과정들이 이제는 모두 사라졌다.
길은 동사에 가깝다는 말, 참 멋진 표현입니다. 잠시 중남미 콜롬비아에 거주하면서 종종 하는 생각이 '산을 뚫어 터널을 내면 더 빨리 갈 텐데 왜 산허리를 구불구불 두르는 좁은 길을 사용할까..' 였습니다. 이 글을 보고 나니 콜롬비아의 '옛길' 사랑이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지네요. 김훈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길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콜롬비아 사람들이 어쩌면 더 지혜로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23.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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