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피로사회ㅣ한병철 Byung-Chul Han, 재독 철학자 (문학과지성사)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책을 여는 첫 문장입니다. 모든 책의 첫 문장이 매력적이지만 <피로사회, Müdigkeits Gesellschaft>의 첫 문장 역시 탁월합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질병이라니,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합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Byung-Chul Han, 1959)의 <피로사회>는 독일에서 2010년 10월 출간 직후 2주 만에 초판이 매진되며 철학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근면성실로 대변되는 독일 사회에 성과사회의 주체가 자기 착취를 통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다는 그의 말은 정신없이 달려가던 사람들을 잠시 멈추게 합니다.
21세기의 시작은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이 21세기 초 병리학적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니라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 신경성 폭력
한병철 철학자의 거의 모든 책의 기저에 깔려있는 '부정성'과 '긍정성'에 대한 이야기가 책의 첫 단락에서부터 등장합니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적 징후이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 피로사회
성과사회의 피로는 서로를 고립시키는 너의 피로, 나의 피로, '고독한 피로'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무릎을 치는 깨달음의 형태는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할 수 있는데 뒷부분은 이해조차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회적인 부분에 대한 제 고민이 그만큼 깊지 않았다는 것인데 일단은 계속 넘어갑니다.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 없는 인간이다.. 긍정적으로 보아준다면 성격 없는 인간이란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역할이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형성은 높은 경제적 효율을 가능하게 한다. - 우울사회
글의 초점이 개인으로 돌아오니 역시 와닿는 문장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역시 사유의 끝에 깨달음이 있습니다. 무형성, 유연성, 긍정성에 대한 개념 정의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성과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색깔이 뚜렷한 개인은 환영받지 못합니다. 반면 성과주의 사회에 적합한 인간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단 하나의 단락으로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역자 후기'의 도움을 받습니다.
"책의 핵심적인 테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사회를 지배해 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등)이 적어도 20세기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등)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타자 착취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자기 착취라는 것이다." - 역자 후기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거대한 시스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생깁니다. 별 생각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질문을 갖게 하는 것, 욕망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채게 하는 것, 해법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데 한병철 철학자가 그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2023.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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