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르헤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논쟁ㅣ이치은, 소설 (알렙)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책을 찾다가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골랐습니다. <보르헤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논쟁>, 책 제목으로 봐서는 평론처럼 보이지만 단편 소설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서는 시간과 기억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 10편을 엮은 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치은 작가(1971)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게 없습니다. 20년 만의 첫 소설집이라고 하는데 '20년'이라니.. 제목도 그렇고, 뭔가 흥미로운 소설일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수록된 단편인 <보르헤스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논쟁>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논쟁이란 시인 엘 돈셀(El Donsel; Andrés Cepeda)과 평론가 벨마르(Luis Enrique Belmar) 사이에 일어난 그의 '마지막 소원'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가상의 논쟁이지만 제법 그럴싸합니다. 벨마르는 시력을 되찾아 그토록 좋아하던 작가의 작품을 다시 읽는 것, 엘 돈셀은 모든 기억을 잃고 자신이 쓴 책을 다시 읽는 것이 보르헤스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엘 돈셀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유명한 작가가 자신이 쓴 글이나 책은 다시 읽어보지 않는다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작가라면 누구나 이 말에 동의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쓴 책을 읽으려 한다네. 하지만 타인의 책을 읽을 때와는 목적이 달라. 쾌락이나 의무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쓴 글이 타인의, 그리고 나 자신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책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서 우리의 책을 읽으려 한다네. 보르헤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네. 하지만..."
공포와 죄책감으로서의 '기억'에 관한 보르헤스의 논쟁을 질문으로 던지고 있는데 화두를 잡는 방법부터 굉장히 신선하고 독특합니다. 보르헤스에 관한 논쟁이 궁금해서 책을 집어 들었는데 이치은이라는 작가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여덟 번째 단편인 <고해성사>에 나오는 죄책감에 대한 한 신부의 말씀이 당연한 말인데 유독 마음에 콕 박히네요.
".. 죄책감은 저지른 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저지를 죄에서 오는 겁니다.. 실제로 행해진 죄가 아니라 아직 마음에만 품은 죄로부터 시작된 고백이 가장 참된 고백입니다."
다섯 번째 단편 <전당포>는 기억(시간)을 사고팔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좋았던 과거 기억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그리고 돈을 갚으면 자신의 기억을 돌려받거나 타인의 더 좋은 기억을 대신 살 수도 있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소설 <모모>가 떠오릅니다.
"그거 재미있겠네요. 다른 사람의 시간으로 하죠. 그런데.. 미리 그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메뉴판 같은 게 있나요?"
미래 어느 시점에는 이런 기술이 실현 가능할 날이 있을까요. 인간에 관한 어떤 것이 '메뉴'화 한다면, 그건 살짝 섬뜩한 일 일것 같습니다.
2023.5.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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