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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책] 권태ㅣ이 상(李箱) (ft.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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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권태ㅣ이 상(李箱) (ft.한국문학)


기독교 방송 CBS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을 구독 중입니다. 서울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님이 가끔 여기서 말씀을 나눠주시는데 언젠가 이 책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중학교 때 이상(李箱)의 <권태>를 읽은 기억은 있는데 당시 특별한 감동을 받았다거나 하진 않은 듯합니다.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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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가 인간의 삶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 했는데 지금 제 상태를 굳이 둘 중 하나로 분류해야 한다면 욕망보다는 권태에 가깝습니다. 큰 고민이나 어려움 없는 잔잔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문학을, 그것도 이상(본명: 김해경)이라는 굉장한 작가의 책을 열어봅니다. 첫 페이지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학작품의 아름다움이 이런것이지.. 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우리말에는 섬세하고 미묘한 정서를 이어 나르는 기능이 있습니다.


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겠을 만큼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돼먹었노? 어제 보던 댑싸리 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이상(李箱)의 글을 읽다 보면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게 그림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인데 그분이 이런 스타일의 글을 씁니다. 툭툭 던지듯 본질을 건드리는 문장들을 주저 없이 쏟아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들이 글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재미있습니다.

 

(tmi. 이상의 MBTI가 혹시 INTP이 아닐까.. 무쓸모 한 생각이 스치네요)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하지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가 폐쇄되었다. 


예민한 성정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예민함이 때론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 가지를 치고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인데 그것이 끝이 없습니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쓴 듯한 이상의 글은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는 꽤 매력적입니다. 예리하고 차가운 이성을 가진 사람은 생각하기 귀찮아서 대충 퉁치는 법이 없습니다. 이상의 글을 <권태> 말고도 다시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자못 이상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이것이 정말이라면 그럼 나는 어째서 배가 고픈가. 무엇을 했다고 배가 고픈가.. 지금의 내 생활은 과연 권태의 극, 그것이다. 그렇건만 내일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는 날이 새지 않는 것 같기도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오늘이 되어 버린 내일 속에서 또 나는 질식할 만큼 심심해해야 되고 기막힐 만큼 답답해해야 한다.


어쩜 이렇게 글을 맛깔나게 쓸까요. '나는 배가 고픈 모양이다' 자신을 제삼자의 눈으로 보는 이러한 화법이 참 재미있습니다. 난 대체 나란 인간조차 알지 못한다는 표현이 뒤에 깔린 듯합니다. '한 밤 저쪽에 또 내일이라는 놈이 한 개 버티고 서 있다' 이 표현 역시 너무 멋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온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결국 내 의지의 범위를 벗어난 일입니다. 매일을 그저 살아내는 것이지요. 구구절절한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저 문장 하나로 이상은 모든 본질을 꿰어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소개해준 김기석 목사님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함과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감정 상태로 이 책을 서가 앞에 서서 두 번을 내리 읽고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 역시 얇은 이 책을 두번 정도 반복해서 읽고 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냥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글을 아주 잘 쓰는 친구가 제 마음을 잘 헤아려서 글로 써둔 것 마냥 읽는 것 자체로 위로가 됩니다.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2022.11.

글약방her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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