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
지하상가로 다니면서 몸을 녹이고 먹을 것도 사먹고 나니 다시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긴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벌써 춥다. 몸이 추위를 기억하는 듯 지하상가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 춥다. 그래도 걷자. 걷다보면 또 적응된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는데 지금 내 모습을 그대로 본 뜬것 같은 조형물을 만났다. 눈보라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가는 여성, 표정을 보니 아마도 속으로 "달리자 달리자 달리다보면 적응된다."라고 하며 페달을 밟는 듯하다.
무튼 나는 오늘 그랑플라스(Grand-Place) 광장의 레이저쇼 야경을 보기로 했으니 추위쯤이야. 어우 추워. 해가 지고 거리에 크리스마스 조명이 들어오고, 가로등이 켜지고, 건물 마다 외벽에 불을 켜니 진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난다. 선물상자로 식당의 한쪽면을 가득 채운 레스토랑도 있다. 예쁘다. 역시 또 걷다보니 추위는 적응이 된다.
오페라극장(La Monnaie De Munt) 앞 광장에는 스케이트장이 오픈했다. 아침엔 없었는데 아마 눈이 오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오후에 개장을 한 듯하다. 얼음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정빙차가 왔다갔다 하면서 손님 맞이 준비중이다. 다시 보니 스케이트장이 아니라 예술공연을 준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안전펜스를 허리 높이로 쳐 놓은 것을 보면. 무튼 나는 스케이트를 탈 생각도, 눈보라 치는 추위에 야외 공연을 볼 생각도 없으므로 지나간다.
깜깜한 밤이 되어야 레이저쇼가 잘 보일테니 시간을 조금 더 보내야한다. 30분 정도 따뜻하게 머물 곳을 찾는데 바로 앞에 도서관(Muntpunt Library)이 보인다. 6층 건물 전체가 도서관인데 책을 대여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도서관이라고 하기보다 대형 서점 느낌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마치 찜질방에 온 듯 따뜻한 공기가 가득하다. 바깥이랑 온도차이가 얼마나 크면 이런 느낌이 들까. 잡지책을 들고 잠시 앉아있는데 허벅지에 쥐가 난것 처럼 세포 하나하나가 스르르 녹는다. 눈바람에 꽁꽁 얼었던 다리가 해동(?)되는가보다. 책을 예의상 손에 들고 30분쯤 앉아서 졸다가 이러다 옆으로 누울 것 같아 밖으로 나간다.
찬 공기에 잠이 확 깬다. 눈이 번쩍. 구글맵을 돌릴까, 종이 지도를 꺼낼까 하다가 손 시릴것 같아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그랑플라스 광장을 찾아간다. 벨기에는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곳 사람들도 정말 영어를 이탈리아 사람들 만큼 못한다. 내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알면 좋겠지만, 그래서 일단 영어를 하는지 먼저 물어보고 그 다음 길을 물어봐야한다. 아니면 또 길을 잃는 불상사가 생기니까.
그랑플라스(Grand-Place) 광장에 도착했다. 아직 조명은 안들어왔다. 조금 더 기다려야 시작하나보다. 여긴 브뤼셀 시청사 맞은편 건물인 시립박물관(Brussels City Museum)이고, 그랑플라스 광장은 14세기에 지어진 이런 우아하고 역사적인 길드하우스로 둘러싸여있다.
10분쯤 지나니 건물에 하나 둘 레이저 조명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시작인가보다. 나도 같이 소리를 질러본다. 조명이 시시각각 바뀌고 배경음악도 웅장하게 깔린다. 오! 여전히 눈은 펑펑 쏟아지고, 나는 콧물 닦고, 우산 쓰고, 카메라 렌즈 닦으면서 사진 찍고, 동영상 찍고 1인 다역을 해내느라 정신이 없다. 휴대폰으로 동영상 찍느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홱 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후다다닥 도망간다. 내 카메라를 노렸는데 내가 카메라 줄을 팔뚝에 10번 넘게 휘감아 놔서 소매치기 실패하고 달아난거다. 역시. 여기 그랑플라스 광장에서 레이저쇼 할때 사람들이 어두운데서 넋놓고 구경하는 틈을 타서 소매치기 하는 인간들이 많다더니.
무튼 나는 다시 동영상 촬영을 재개한다. 배경음악 소리도 점점 웅장해지고 조명도 점점 화려해진다. 멋있다. 역시 보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이곳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지금 이 공연의 관객이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근사한 경험이다.
레이저쇼가 끝나고 이제 숙소로 간다. 오늘 내가 계획한 모든 일정을 마무리 했으므로, 그랑플라스 광장에서 숙소까지는 멀지 않고 가는 길도 쉬워서 외투 호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후드를 뒤집어 쓴채 무작정 직진한다.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6시 30분쯤. 방엔 아직 아무도 안 왔다. 바로 씻으러 들어가서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피부가 빨갛게 될 정도로 오래 샤워를 했다. 눈에 젖은 운동화는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두고 젖은 양말도 손빨래해서 같이 라디에이터 위에 널어둔다. 온 몸이 얼어 있는 데다가 따뜻한 물어 샤워를 했더니 모든 혈관이 팽창하는 듯 볼도 빨갛고 손발도 빨갛다. 엄청난 추위를 이기고 뭔가 해낸 듯한 뿌듯함과 기쁨이 밀려온다.
이어폰 꽂고 음악 들으며 따뜻한 이불 속에서 쉬는데, 오늘 이 방에 묵을 여자사람이 한명 방으로 들어온다. 이름은 쉴라, 뉴질랜드에서 왔단다. 어째 이번 여행에서는 남반구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시즌을 추운 나라에서 보내려고 여행을 오는 듯하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오늘 일과를 공유하는데 쉴라는 오늘 겐트를 여행하고 왔다고 한다. 나는 내일 브뤼셀에서 오늘 안 가본 곳을 구경할거라고 했더니 그러지말고 겐트에 당일로 다녀오라고 추천을 해준다. 겐트까지 왕복 €10인 기차표가 있다며 표를 어떻게 구입하는지까지 알려준다. 내일은 겐트에 다녀와야겠다.
2022.1.
글약방her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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