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9.
베르겐 역(Bergen Station) 물품 보관함에 맡겨둔 배낭을 찾아서 기차를 타러 간다. 기차 출발시각은 11:30분. 오슬로(Oslo)까지는 대략 갈아타는 시간을 포함해 7시간이 걸린다. 저녁 무렵 오슬로에 도착하면 저녁을 먹기로 하고 점심 먹기엔 이른 시각이라 샌드위치랑 스낵, 음료를 사서 기차에서 먹기로 했다.
기차 플랫폼을 찾고 있는데 어째 분위기가 어수선한 게 뭔가 느낌이 쎄 하다. 직원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더니 보스(Voss) 가는 거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보스(Voss)행 기차에 문제가 생겨서 버스를 준비해뒀다고 버스를 타라고 한다. 노르웨이 처음 도착하던 날도 기차가 2시간 연착되더니 이번엔 기차가 고장이다. 버라이어티 한 노르웨이 교통이다. 역 앞에 주차된 고속버스를 타고 경유지인 보스로 간다.
버스를 타니 창밖 경치를 더 가깝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기차 선로는 산에 터널을 뚫어 만들고, 차도는 산 허리를 둘러가니 그런 것이겠지. 거울처럼 깨끗한 호수에 반영된 산세를 넋을 놓고 바라보다 사진으로 몇 장 남겨본다. 창밖 풍경이 마을로 변해갈 즈음 보스에 도착한다.
보스(Voss)에는 우리가 갈아탈 기차가 정차해있다. 시간도 아슬아슬하다. 2분 전. 버스가 조금만 늦었으면 우린 또 다음 기차를 기다려야 했겠지. 버스에서 내려 곧장 기차에 오른다. 부디 우리를 무탈하게 오슬로(Oslo)까지 데려다주길 바라며.
보스를 출발해 기차가 달리는데 창밖으로 마치 그린란드나 아이슬란드를 연상케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높이는 낮은데 물살은 센 폭포가 이국적이고 이색적이다. 겉으로 볼 땐 잔잔한 호수지만 물속은 유속이 무척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멋지다.
점심으로 준비한 샌드위치와 스낵을 꺼내 먹고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뭔가 웅성웅성, 또 분위기가 쎄 하다. 노르웨이어로 열차 내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짐을 챙긴다. 우리는 그다음 영어 안내방송을 듣고서야 앞서가던 기차에 사고가 났다는 안내를 듣는다. 근처 역에 정차할 예정이니 내려서 준비된 버스에 탑승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런. 오늘은 버스+기차+버스+기차 계속 환승하는 일정인가. 현지인 승객들은 아무 말 없이 기차에서 내려 버스에 올라탄다. 자주 있는 일인가? 왜 다들 '한마디'씩 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도 짐을 챙겨 역에 마련된 버스를 탄다. 그런데 이 버스는 미니버스다. 무척이나 덜컹거리는데, 대체 얼마나 이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것일까. 묻고 싶지만 '교양 있는 외국인'인척 하며 조용히 앉아 덜컹거림의 충격을 온몸으로 흡수한다. 으. 이럴 땐 잠드는 게 최선이다. 눈을 감고 바로 취침.
1시간 30분쯤 버스로 이동을 하고 다시 어떤 기차역에 우리를 내려준다. 구글맵을 돌려보니 아까 내린 기차역에서 역 5개쯤을 버스로 왔다. 여긴 Nesbyen 기차역이다. 시간은 5시가 다되어간다. 불평하는 말을 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상황이 당연한 것인지, 투덜대는 우리가 이상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다시 기차에 오른다. 무척 고단하다. 온몸과 온 얼굴로 미안함과 심각함을 풍기며 우리를 버스에서 기차로 안내해준 꽁지머리 역무원이 창 밖으로 지나간다.
다시 오슬로로 가는 기차. 여러차례 기차에서 버스로, 버스에서 기차로 옮겨 타는 동안 뭔가 잃어버린 사람도 있다. 저분이 소지품을 잘 찾으셨길 바란다. 베르겐에서 기차로 오슬로에 오는 일정이 어쩌다 베르겐에서 버스 타고, 중간에 기차 타고, 다시 버스 타고, 다시 기차 타서 오슬로로 오는 복잡한 여정이 되었다. 어찌 생각해보면 기차 사고가 수습될 동안 승객들을 역에 마냥 기다리게 하지 않고 기차 사고가 난 구간을 지나 그다음 역까지 버스를 준비해준 노르웨이 열차(NSB)의 대처가 현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튼 우리는 8시를 15분 남겨두고 오슬로에 도착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오슬로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이니까. 비록 계획보다 1시간 15분이나 늦었지만 더 늦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역을 빠져나간다. 우리와 함께 베르겐에서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오슬로까지 온 멍뭉이도 무사히 주인과 함께 집으로 간다. 에스컬레이터 탈 땐 털이 끼이지 않게 살짝 비켜선다. 영리한 멍뭉아, 너도 고생했어 조심히 가!
몸이 힘들 땐 뜨끈한 아시안 국물음식이 먹고 싶다. 며칠 전 오슬로에 처음 왔던 날 봐 둔 아시안 음식점으로 간다. 국물 있는 면 하나랑 볶음밥 하나씩을 주문해서 먹는다. 이렇게 두 개가 1인분이고, 가격은 우리 돈으로 3만 5천 원 정도. 양은 생각보다 많다. 나는 볶음밥을 조금 남기고, 친구는 볶음밥도 국물 면도 남김없이 다 먹었다.
8시가 넘었지만 아직은 낮이 긴 시즌이라 어둡지 않아 숙소에 가기 전 근처 산책을 한다. 배가 부르니 오늘 우리의 여정이 다시 떠오른다. 기차로 7시간이나 떨어진 베르겐(Bergen), 거리가 580km 정도 되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에서 서울까지가 420km니까 대체 어디까지냐. 무튼 그렇게 먼 거리를 무사히 이동해왔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
여행을 다니면서 다양한 해프닝을 겪다 보면 겸손을 배운다. 내가 아무리 길을 잘 알고 언어를 잘 안다 해도 그 순간에 앞서가던 열차에 사고가 나면 모든 일정이 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행을 준비할 때 일정을 계획하지 않는 편을 선호한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여행이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찌 됐건 해는 지고, 우리는 밥을 먹었고, 오늘 밤 묵을 숙소를 예약했고, 숙소로 갈 교통비도 있다. 완벽한 하루다.
며칠 전 오슬로에서 묵은 숙소가 너무 마음에 들어 오늘도 같은 곳으로 예약했다. 그리고 오늘은 지난번처럼 구글맵을 보며 오르막길을 2시간 동안 걸어가는 어리석은 결정은 하지 않는다. 숙소로 가는 트램을 타기 위해 정류장에 기다리는데 우리가 기다리던 번호의 트램이 오랫동안 안 와서 비슷한 경로로 운행하는 다른 트램을 탄다. 역시나 잘못 탔다. 으.
인근에 내려 또다시 30분가량 오르막길을 올라가서야 숙소에 도착한다. 완전히 깜깜한 밤이 되었다. 하루를 무척 길게 쓴 날이다. 다리가 아프고 발가락도 아프지만, 뭔가 알 수 없는 기쁨과 만족감으로 정신은 맑다고 해야 할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오늘 밤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1층 바에서 친구와 따뜻한 차 한잔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시각까지 깨어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은 거의 늦게까지 잠을 안 자는 편인데, 책으로 치면 에필로그 같은 시간이다. 여행을 쭉 정리하고, 또 내일은 집으로 돌아가니 피곤해도 비행기 안에서 쉬면 될 일이니까. 며칠 전엔 듣지 못했던 풀벌레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분명 같은 숙소인데 며칠 전엔 내 마음에 풀벌레 소리가 들어올 틈이 없었나 보다.
2022. 1.
글약방her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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