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국ㅡ현재 폴란드ㅡ 출신 영국 소설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의 대표작 <로드 짐 Lord Jim>입니다. 조셉 콘래드는 어릴 때 양친을 모두 잃고 외숙의 보살핌으로 성장했으며 1874년 폴란드를 떠나 선원으로 프랑스와 영국 상선을 탑니다. 이후 1886년 영국으로 귀화한 후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67세로 별세하기까지 무수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로드 짐>은 그가 작가로서 전성기이던 1900년에 발표한 소설로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핵심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됩니다.
소설은 주인공 짐에 대한 자세한 소개로 시작됩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짐은 선원이 되기로 하고 2년간의 훈련을 마친 후 승승장구하여 파트나 호의 일등항해사로 취직합니다. 800여 명의 순례자들을 싣고 항해를 떠나지만 한 밤중 파트나 호는 침몰 위기에 처하고 선장과 선원들은 배를 버리고 탈출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엔진은 계속해서 쿵쿵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웬일이지?" (p48)
파트나 호가 침몰 위기에 처한 당시의 상황은 구체적인 묘사 보다는 짐의 느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풍랑이 치던 밤에 선장과 선원들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으며 반쯤 공황상태로 배를 버리고 탈출한 것입니다. 다행히 배는 침몰하지 않았고 이제 그들은 법적 처벌과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망칠 수 없었답니다." 짐이 입을 열엇어. "선장은 도망쳤지요. 하지만 저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고요." (p124)
<로드 짐>은 서술 관점이 독특합니다. 도입부에서는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 5장에서부터는 짐을 아는 말로라는 인물에 의해 서술됩니다.
프랑스 해군에 의해 배가 무사히 항구로 들어오고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모두 처벌을 피해 도망쳤지만 짐은 재판에 출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합니다. 800명의 승객을 실은 파트나 호에 구명정은 단 일곱 척 밖에 없었으며 짐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할 틈도 없이 정신없이 구명정에 몸을 실었다고 말합니다.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말이죠.
"배는 성벽보다도 더 높아 보였습니다. 구명정을 굽어 보고 있는 절벽 같더군요... 저는 죽고 싶은 심경이었습니다." 그는 울부 짖고 있었어. "되돌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마치 우물 속으로 뛰어든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깊이가 한량없는 구멍 속으로 말입니다." (p171)
짐은 선원 자격을 박탈 당하고 죄책감에 이곳저곳을 떠돌다 동남아의 어느 오지 마을 파투산에 정착해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짐은 타고난 처세와 성실함으로 약 2년 만에 파투산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둡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로드 짐>의 서사가 펼쳐집니다.
"인간이란 주변 사람들에 비해 별로 더 나쁘지 않으면서도 이따금 아주 간악하게 행동할 때가 있다오."... 한때 자기가 맡았던 일에 충실치 못했던 적이 있는 그가 이제 모든 사람들의 신임을 다시 상실하고 말았다... 외로움이 그를 엄습해 왔다. (p262-282)
자신에게 목숨을 맡기고 파트나 호에 올랐던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은 짐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칩니다.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의 짐이 됩니다. 본심이 어떠했건. 짐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하지 않고 혼자 짊어지고 갑니다.
<로드 짐>의 서사는 1880년 7월 1천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가던 제다 호의 영국인 선장과 선원들이 악천후에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을 믿고 배에 오른 승객들에 대한 책임과 생명 윤리마저 져버린 인간의 편협한 사고를 박진감 있는 스토리텔링과 함께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 1965년에는 리처드 브룩스 감독의 동명의 영화 <로드 짐 Lord Jim>으로도 각색됩니다.
우리는 알아야겠다. 그는 우리 중의 한 사람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서술자의 이 한 마디가 <로드 짐>을 완벽하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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