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작가로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년생)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 My name is RED>입니다. 1998년 발표한 소설로 16세기 오스만 제국을 배경으로 한 세밀화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 이름은 빨강>은 발표 직후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수많은 국제 문학상을 받았으며 노벨문학상 수상에도 기여합니다.
어릴 적부터 화가를 꿈꾸다 건축학도가 되었고 마침내는 작가가 된 오르한 파묵 자신의 관심사를 집대성한 예술작품과도 같은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내 이름은 빨강>은 마치 건축물을 올리듯 서로 다른 관점의 이야기들을 빈틈없이 엮어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전체 59개 장으로 이루어집니다. 각 장은 엘레강스, 카라, 개, 나무, 빨강, 살인자, 에니시테, 셰큐레 등 사람과 동물 식물 개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들이 화자로 등장해 각자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독자는 이들의 목소리를 종합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내야 합니다. <내 이름은 빨강>이 추리소설 형식을 하고 있으니 이러한 플롯은 소설에 대한 흥미를 배가시킵니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p15) _1 나는 죽은 몸
1부의 화자는 엘레강스의 시체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은 몸이 말을 합니다.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는 첫 문장을 보니 오르한 파묵의 다른 소설 <빨강머리 여인(2016)>에 등장하는 우물 기술자 마흐무트 우스ㅡ우물을 파다가 그 구덩이에 빠져 죽다 살아난ㅡ가 연상됩니다.
궁정의 능력있는 세밀화가 엘레강스는 왜 죽었고 누가, 무슨 이유로 그를 죽인 것일까요.
"궁정화원에 소속된 장인들 가운데 가장 솜씨 좋은 자들과 일일이 접촉했다. 그들 중 누구에게는 개를, 누구에게는 나무를, 누구에게는 책의 테두리 장식과 지평선의 구름을, 또 누구에게는 말을 그리도록 하고 있다... 나조차도 그 그림들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그것들이 어떤 그림이 되어야 하는지만 알 뿐이란다." (p52-53) _5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소설의 여주인공 셰큐레의 부친이자 술탄의 지시로 밀서 제작을 주도하고 있는 에니시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궁정 세밀화가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해 그들에게 큰 그림의 부분 부분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어떤 작품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건 소설 <내 이름은 빨강> 역시 그렇게 수많은 화자들에 의해, 결말은 그 누구도 모른 채 쓰여지고 있습니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시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 (p321) _31 내 이름은 빨강
31장에서는 빨강이 목소리를 냅니다. 굉장한 자부심이네요! <내 이름은 빨강>에서 빨강의 역할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내 이름은 빨강>은 엘레강스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로 시작하지만 희대의 미인인 셰큐레를 둘러싼 남자들의 러브스토리, 유럽화풍을 도입하려는 이들과 전통화풍을 고수하려는 세력 간의 갈등 같은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각각 움직이지 않고 세밀하게 설계된 건축물의 세부구조로 자리 잡습니다. 최종 결과물은 독자들 마다 다르게 그려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려지지 못할 이 이야기를 어쩌면 글로 쓸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에 제 아들 오르한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하산과 카라가 제게 보낸 편지들과 가엾은 엘레강스의 몸에서 나온, 물감이 번진 말 그림을 주저 없이 그 애에게 주었지요. (p333) _59 나는 셰큐레입니다
16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내 이름은 빨강> 속 이야기는 셰큐레의 아들 오르한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해질 것이라는 게 마지막장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오르한이 쓴 <내 이름은 빨강>이 추리소설이자 역사소설로 분류되는 이유입니다.
이 책 너무 재미있습니다.
2025.5. 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빨강머리 여인」을 읽고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빨강머리 여인 The Red Haired Woman」을 읽고 , 으로 잘 알려진 튀르키예의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의 소설 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2006년 튀르키예인 최초로 노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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