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 3부작'이라는 자전적 소설 시리즈로 유명한 캐나다 출신 영국 소설가 레이첼 커스크(Rachel Cusk, 1967-)의 장편소설 <윤곽 Outline>입니다. 이 책은 <윤곽(2014)>, <환승(2016)>, <영광(2018)>으로 발전해 나가는 프로젝트의 출발점으로 주관적이고 직관적인 견해를 배제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묘사하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라는 문단의 평을 받습니다.
'윤곽 3부작'을 통해 레이첼 커스크는 타인을 통해 자신의 윤곽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스토리텔링 기법을 거부한 다소 혼란하고 파편적인 구성을 한 작품입니다. 해설을 먼저 가이드 삼아 읽고 소설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윤곽>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영국에서 아테네로 강의를 하러 온 여성 작가입니다. 그러나 소설 전반에 걸쳐 자신의 목소리는 최소화하고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대부분의 서사를 채워갑니다. 비행기 옆자리 남자, 강의실의 학생, 오래된 친구, 이런 다양한 인물들이 자신의 인생을 주인공에게 털어놓습니다.
사람들이 본인들이라면 절대 꿈도 꾸지 않을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권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그를 파멸로 몰아넣었다. 심지어 가장 친절한 사람들,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도 그의 관심사를 진심으로 생각해주지 않았다. (p188)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무엇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가끔 우리는 타인의 삶을 비추는 거울같은 존재로 나인지 당신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것을 정체성이라고 믿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윤곽>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계속해서 하게 됩니다.
자기를 속이는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는 겁니다. (p114)
이 말에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리고 한 편으로는 자기를 속이는 능력 덕분에 인류 역사가 이어져온 건 아닌가 하는 거창한 생각도 해봅니다.
기댈 수 있는 정체성이 없는 사람이 더 좋은 작가가 된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을 덜 뒤틀린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에 있을 때보다 미국에 있을 때가 더 아일랜드인다웠다. (p53)
주인공은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바로 이것이 <윤곽>의 독특한 플롯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하나의 퍼즐처럼 다양한 주변인들의 이야기와 나름의 분석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윤곽>을 잡아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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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내 바깥에 있는 대상에서 나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을 보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내 삶에 대한 평가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p91)
옆자리 남자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라는 하나의 형태, 윤곽을 그려볼 수 있었다. (p281)
이렇게 <윤곽>의 주인공은 타인들의 삶을 조합하며 자신의 실루엣을 서서히 드러냅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 또한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어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일까요. 제 <윤곽>을 드러나게해주는 주변인들이 새삼 고맙게 여겨집니다.
2025.5.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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