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거(Julius Berger, 1954)의 에세이 <이슬의 소리를 들어라 Tautropfen>입니다. 2019년에 '이슬방울 Tautropfen'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출간되었으며 율리우스 베르거가 직접 촬영한 여러 장의 이슬방울 사진과 인생과 음악에 관한 짧은 글과 시가 수록돼 있습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가 60대 중반에 내놓은 이 에세이는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예술가는 모든 예술 분야를 어느정도는 무리 없이 다루어내는 듯합니다. <이슬의 소리를 들어라>에 담긴 사진도, 글도, 시도 참 좋습니다.
내게 늘 찾아오는 예감은 우리 인생이 / 선이라는 것, 신이 그리시는 어떤 그림의 / 일부라는 것, 그러나 누가 고치리 / 잘못 엇나간 선들을. 우리네 삶이 / 거룩한 도화지를 스치지조차 / 못할 때면? _「예감 Ahnung」
어떤 일을 계획할 때나 누군가를 만날 때 혹은 아무런 배경 없이 예감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율리우스 베르거에게 「예감 Ahnung」은 '선'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선'은 신이 그리시는 거룩한 그림의 일부이지만 우리는 늘 잘못 긋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못 그은 선조차 사용하실 거라 믿으며 오늘도 선을 긋습니다.
이슬에 부여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맑고 깨끗하고 어느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의 결정체를 이슬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연약해서 약한 숨에도 흔들리고 쉽게 형체를 잃어버리는 대상이기도 한 이슬을 사진에 담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숨을 죽였을 율리우스 베르거의 정성이 사진에서 느껴집니다. 그 어떤 지점을 만나기 위한 섬세한 시도가 말이죠.
무엇을 할 수 있노라 여기는 이 있거든, 바로 그 때 그는 제 안에 경계를 긋는 셈이다. 사람은 자기 한계 너머를 바라보아야 마땅하니 그때에야 제 할 수 있는 바가 적음을 짐작하고 더 애를 쓰거나 혹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_「사람이 할 수 있는 것 그 무엇인가 Was kann der Mensch」
나이가 들면 내다볼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우리가 자유롭게 넘나들게 될 저 경계 너머의 영역을 말이다... 빛이 거하는 산을 오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우리는 여정에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섭리를 경험한다. 우리의 발걸음은 과거를 반추하거나 앞날을 내다보는 시선에 따라가야 할 바를 찾는다. _「전망과 회고 Ausblick und Ruckblick」
율리우스 베르거가 2014년 5월 20일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쓴 글이라는 설명이 붙은 「전망과 회고」입니다. 구글링하다보니 율리우스 베르거의 아내가 한국분이시네요. 한국에 자주 오가셨을 듯합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동안 신의 섭리를 떠올린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율리우스 베르거가 말하는 '경계'에 조금씩 다가가는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야 할 바를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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