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고 재미있는 시리즈 소설을 발견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작가 요른 릴(Jorn Riel, 1931-2023)의 소설 <북극 허풍담 시리즈> 제1편, 「즐거운 장례식」입니다. <북극 허풍담 시리즈>는 1974년부터 약 20년간 출간된 10권의 소설집으로 요른 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명세계와는 거리가 먼 그린란드 북동부에서 살아가는 괴짜 사냥꾼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각 단편이 옴니버스식으로 엮여있습니다.
<북극 허풍담 시리즈>는 덴마크에서 태어난 요른 릴이 19세에 그린란드 북동부 탐사에 참여했다가 그곳의 매력에 빠져 16년간 지내면서 겪었던 놀라운 체험이나 들었던 이야기를 쓴 것으로 '허풍담'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초가 됩니다.
<북극 허풍담 1, 즐거운 장례식>에는 표제작 「즐거운 장례식」을 포함한 모두 10편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모든 이야기들이 가볍고 유쾌합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인생에 통달한 듯 괴짜스럽고 생각이나 행동에도 막힘이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문명인들을 기이한 듯 쳐다볼 것만 같습니다.
표제작인 「즐거운 장례식」에는 그린란드 북동부 로스만에서 함께 살던 두 친구 로이비크와 얄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11월 1일 얄이 얼음을 지고 옮기다 갑자기 죽어버립니다. 요리를 준비 중이던 로이비크는 놀라기는커녕 얄을 향해 냅다 비난을 쏟아냅니다.
"내가 요리 담당일 때는 한 달 내내 그렇게 돼지같이 처먹더니 자기 차례가 오자마자 뒈지다니! 어쩌면 그렇게 양심이 없지?" 한편으로는 기념할 만한 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머저리 같은 페로제도 놈을 위해 건배! 네가 떠난 걸 축하하며 건배! 저세상에서의 건강을 위해 건배!" (p152-154)
친구의 경우없는 죽음에 분노하던 로이비크는 얄을 침대에 옮겨두고 간단하게나마 친구를 추모(?)합니다. 눈을 감겨주고 입을 다물게 해 준 다음 식탁 의자에 앉혀 넘어지지 않게 끈으로 묶어 밖에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얄의 입에 그가 늘 물고 다니던 파이프를 물려줍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얄이 있는 저세상으로 가겠지? 그럼 우리도 이렇게 친구들 집을 방문하고 싶을 거야. 친구들과 동물들, 대자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거지. 로이비크, 정말 아름다운 배려야." (p157)
그리고 얄을 썰매에 태우고 비요르켄보르의 친구들을 방문합니다. 장례식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서인데 모두들 조금씩 힘을 보태고 널빤지로 관을 제작해주기도 합니다. 친구들은 의자에 묶인 얄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후 더 어이없는 상황들이 연이어 일어나지만 그 누구도 놀라거나 고인에 대한 예가 아니라며 상황을 정리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고 웃으며 넘깁니다. 즐거운 장례식이라는 표제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북극 허풍담>입니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다」에서는 그린란드 북동부 작은 섬마을 비요르켄보르에서의 일화가 그려집니다. 바지를 수선하면서 역사를 논하는 비요르켄과 라스릴, 낯짝이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비요르켄은 소위 문명에 속한 사람들의 역사는 수다를 떠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자신들의 세계에서 배울 게 없음을 깨닫고 북극으로 눈을 돌릴 것이라 말합니다. 북극 사람들이 세계사의 훌륭한 표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 아래 사람들은 늘 진창 속을 헤매, 제 할 일도 못하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지." (p71)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가 없네요. 이토록 단호하게 '아랫동네'를 씹어대는 북극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 집니다.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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