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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레이먼드 챈들러의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읽고ㅣ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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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중반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Thornton Chandler, 1888-1959)의 에세이집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Chandler Style>입니다. 이 책은 챈들러가 작가, 편집자, 독자들에게 쓴 편지 68편을 엮은 것으로 각 편지마다 그의 글쓰기에 관한 견해와 작가라는 일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탐정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작가로 그의 작품 속 사설탐정 '필립 말로' 역시 유명인입니다. <빅 슬립>, <안녕, 내 사랑>, <높은 창>, <호수의 여인>, <시골 아가씨>, <기나긴 이별> 등이 필립 말로 시리즈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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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3월 15일에 어느 편집자에게 쓴 글을 보면 고집스러운 괴짜 같은 레이먼드 챈들러 역시 독자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작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거칠고 빠르고 폭력이 난무하는 글을 쓰면 그런 이유로 욕을 먹고, 그래서 그다음엔 좀 순화해서 전개시키면 또 단조롭다고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독자들로부터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듣게 되는 어려움은 유명 작가의 숙명이겠지요. 욕을 먹는 것 역시도. 

 

 

 

 

글쓰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스타일이고, 스타일은 작가가 시간을 들여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투자입니다... 내가 얻은 지혜란, 글쓰기 기술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빈약한 재능이나 재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시일 뿐이라는 믿음과 다소 상통하니까요. (p35-37) 

 

스타일은 아마도 문예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서 핵심이 되는 지점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글쓰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이 스타일이며 스타일에 들이는 투자가 가장 가치있다고 말합니다. 집필 기술에 집착하는 것은 작가로서 재능 없음의 방증이라는 뾰족한 지적도 곁들입니다.

 

 

나에게 플롯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라나는 거지요. 플롯이 자라나길 거부하면 그 작품은 버리고 다시 시작합니다. (p70) 

 

레이먼드 챈들러는 작품을 쓰기에 앞서 미리 플롯을 세워놓고 집필하지 않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동시에 머릿속으로 플롯을 굴렸는데 역시 그는 작가로서 전형적인 재능인이었습니다. 자신은 글을 쓰기전에 아주 세세하게 플롯을 구상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말속에 은은한 자만이 녹아있습니다. 짝짝짝.

 

 

 

작가는 지금 현재 하려고 하는 일 앞에서 다시 아이가 됩니다. 아무리 상투적인 기교를 많이 익혔다 한들, 작가에게 지금 도움이 되는 것은 열정과 겸손함뿐입니다. (p78)

 

1957년 3월 26일에 쓴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라는 표제의 편지입니다. 작가가 되려는 이들에게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얻으려 하지 말라고,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따끔한 충고를 합니다. 실패와 좌절을 반복하고 반복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마치 모든 것을 처음 배우는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말이죠.

 

 

무릎 위에 내 비서를 안고 있는 사진이 특히 잘 나왔더군요. 이제 열네 살이 된 검은 페르시안 고양이입니다. (p195-196)

 

1945년 3월 19일에 쓴 '나의 비서 나의 고양이'입니다. 글을 쓸 때 교정지 위에 앉아 있거나 타자기 위로 뛰어 오르기도 하는 고양이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유능한 비서입니다. 이 유능한 비서는 작가에게 층고ㅡ"지금 쓰고 있는 그 원고는 시간 낭비야 친구"ㅡ를 건네기도 하고 격려ㅡ"좀 더 잘할 수 있잖아"를 해주기도 합니다. 천재 작가에게 감히 충고할 수 있는 존재는 역시 고양이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정기적으로 일하지 않는 간헐적 노동자로 다시 말해 내킬 때만 글을 씁니다. 내킬 때는 글쓰기가 얼마나 쉽게 느껴지는지... 위에 쓴 글을 다시 읽어 보니 여기저기서 다소 거만한 어조가 느껴지는 것 같군요. 전체적으로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을까봐 걱정스럽지만 불행히도 사실이죠. 맞는 말이고, 나란 사람은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다소 거만한 사람이니까요. (p205-206) 

 

1950년 11월 10일에 쓴 '나란 사람은'이라는 글입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평균적인 것들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레이먼드 챈들러는 자신이 매우 예민하고 소심한데다 가끔은 신랄하고 호전적이며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결국 자기 일에 상당한 재능이 있고 자기 삶에도 자신만만한 사람이 보이는 성격적 특징이네요. 60세가 넘은 만년의 작가가 이런 글을 쓴다는 건 이제 '자만'을 자신의 캐릭터로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호감을 갖게 됩니다.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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