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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조르주 페렉의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읽고ㅣ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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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특별히 애정하는 작가의 책입니다. 이 작가의 책을 원서로 읽어보고 싶어 프랑스어를 배우기로 했을 정도인데 감사하게도 훌륭한 번역 덕분에 모국어로도 잘 읽고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1936-1982)의 자전적 소설 <W 또는 유년의 기억 W ou le souvenir d'enfance>은 조금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서사가 교차하며 서술되는데 하나는 W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또 하나는 조르주 페렉의 자전 소설입니다. 책에서는 글씨 폰트에 변화를 주며 서로 다른 이야기라는 구분을 해주고 있습니다. 해설에 따르면 이 책이 조르주 페렉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자주 연구되었을 만큼 단순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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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에 다녀온 여행담을 털어놓기까지 나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오늘, 나는 어떤 강력한 당위에 떠밀려, 내가 목격한 그 사건은 반드시 밝혀져 백일하에 공개되어야 한다는 확신하에 마침내 결심을 했다. (p13)

 

<W 또는 유년의 기억> 1부 첫 문장에서 일인칭 화자는 자신의 W 여행담을 공개할 것이라고 밝힙니다. W에 대한 기억은 유령의 도시, 피비린내 나는 경기, 환호성, 바닷바람에 펄럭이던 만국기들이 뒤섞여 있다고 부연합니다. 그리고 2부 첫 문장에서는 '세상 반대편 저 끝, 거기에 섬이 하나 있었을 것이다. 그 섬은 W라 불린다.(p83)'라고 마치 W가 상상 속 미지의 장소인 듯 전혀 새로운 어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에겐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나는 거의 도발적이라 할 만큼 당당하게 확언했다.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내게 묻지 말아야 한다. 다른 역사, 대문자로 쓰인 커다란 역사(Histoire)가 이미 나 대신 답을 했다. 전쟁, 강제수용소. (p17)

 

자전 소설 부분에서 조르주 페렉은 자신의 유년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네 살에 아버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하고 여섯 살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어머니를 잃고 9살 무렵 고모에게 입양됩니다. 이후 12살에서 15세 무렵 페렉은 W라는 역사를 그려내게 되고 그것이 분절적인 기억의 조각이 되어 이 책 곳곳에 퍼즐처럼 끼워집니다. 결코 완성되지 못할 직소 퍼즐 말이죠. 

 

이제부터는 기억이 존재한다. 머리에 얼핏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기억, 혹은 끈덕지게 떠오르는 기억, 혹은 사소하거나 묵직한 기억들인데 그런 기억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서로 이어지지 않는 이 글처럼, (p87)

 

매끄럽지 않은, 논리가 없는, 일관성이 없고, 실제인지 허구인지 조차 알 수 없는, 그것이 바로 <W 또는 유년의 기억>의 실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너무 좋아서 며칠 동안 가방에 넣고 다니며 조금씩 아껴 읽었습니다. 조르주 페렉이 자신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언젠가 원서로 꼭 읽어보고 싶네요. 절절한 팬심. 

 

 

W의 선수들은 자기 삶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다. 흘러가는 세월에도 기대할 게 아무것도 없다. 낮과 밤이 바뀌고 계절이 흘러도 어떤 구원도 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개의 세계, 주인의 세계와 노예의 세계가 있다. 주인에게는 범접할 수 없고 노예들은 서로 물어뜯고 싸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W의 선수는 모르고 산다. (p184-185)

 

W 사회의 '죄종적 특징'으로 끊임없이 점을 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점을 친다는 것은 철저한 무력감으로 인해 오로지 신의 은총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사회를 방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W를 유년의 페렉은 그리고 있었습니다.  

 

조르주 페렉은 1970년부터 약 5년에 걸쳐 이 책을 집필했고 1975년 출간했습니다. 글을 쓰고자 결심한 것과 자신의 역사를 써야겠다는 계획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조르주 페렉에게 <W 또는 유년의 기억>은 그가 작가가 된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4살, 6살, 너무 어린 나이에 양친을 모두 잃고 10대가 된 소년이 W를 그려낸건 어쩌면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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