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 Life: A User's Manual」을 읽고
1978년 출판된 그 해 메디치 상을 수상한 조르주 페렉(George Perec, 1936-1982)의 명실상부한 대표작 <인생사용법 La Vie mode d'emploi>입니다. 조르주 페렉은 프랑스의 잠재문학실험식 울리포(OuLiPo)의 일원으로 이 책은 그의 문학적 실험을 집대성한 작품입니다.
소설은 약 750페이지에 달하는데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퍼즐과도 같습니다. 이리저리 끼워 맞추고 이야기를 재구성하며 읽다 보면 소설의 제목이 왜 <인생사용법>인지를 알게 됩니다. 80억 개의 퍼즐조각으로 이루어진 인생들의 조합이 현재의 지구라는 퍼즐 전체를 구성하듯 말이죠.
42세에 이 책을 발표한 조르주 페렉이 46세에 병으로 요절하지 않았다면 더 파격적이고 훌륭한 작품들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이기심들만큼 <인생사용법>은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조각들은 오직 함께 짜맞추어졌을 때만 파악 가능한 어떤 형태와 의미를 얻게 된다. 퍼즐 조각 하나하나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나의 조각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자 불투명한 도전일 뿐이다. (...) 퍼즐은 혼자 하는 놀이가 아니다. 퍼즐을 맞추는 이가 수행하는 각각의 행위는 퍼즐을 제작한 이가 이미 행한 행위다. 각각의 모색, 각각의 직관, 각각의 희망, 각각의 절망은 타인에 의해 이미 결정되고 계산되고 연구되었던 것들이다. _머리말 가운데
<인생사용법>은 전체 9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장은 모든 층이 10칸의 방으로 구성된 지상 8층, 지하 2층 건물의 100칸의 방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서사 구조는 체스 게임의 행마법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역자의 설명이 있으며 책 뒷면 부록에 평면도와 함께 자세히 설명해두고 있습니다. 조르주 페렉이 <인생사용법>을 구상하면서 스케치한 그림과 모형도 역시 수록돼 있는데 천재적인 프로그램 개발자의 연구물을 보는 듯합니다.
실험적 소설의 거장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 <인생사용법>을 일컬어 '소설의 역사에서 마지막 중대 사건'이라고 격찬합니다.
"도대체 수채화를 가지고 뭘 하려는 건데요?" "물론 퍼즐이지요." 바틀부스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_바틀부스 1 가운데
99개 장에 달하는 <인생사용법>의 중심 서사는 바틀부스(Bartlebooth)의 퍼즐 스토리입니다. 그는 약 10년 동안 수채화를 배우고, 이후 20년 동안 세계를 다니며 항구를 주제로 수채화 500점을 그립니다. 그것을 윙클레ㅡ전문기술자ㅡ에게 보내 각각 750조각의 퍼즐로 제작하고, 다시 20년간 그 퍼즐을 15일에 한 개씩 조립합니다.
바틀부스는 자신의 퍼즐 앞에 앉아 있다. 그는 머리가 벗어지고 앙상하고 밀랍같은 낯빛에 생기가 사라진 눈을 가진 노인으로 (...) 왼손의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 사이에는 최후의 퍼즐 조각이 끼어 있다. _바틀부스 5 가운데
바틀부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 손에 쥔 마지막 퍼즐조각, 그리고 100개의 방 가운데 99개의 방만 들여다본 조르주 페렉, 인생을 완성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10년은 배우고, 20년은 여행하고, 20년은 지나간 삶을 복기한다는 바틀부스의 삶이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았습니다. '밀랍 같은 낯빛'이라는 표현에서 늙음과 죽음은 <인생사용법>에서 결코 누락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르주 페렉은 <인생사용법> 출간 이후 이 작품과 작별하는 게 너무 아쉬워 이듬해 1979년, '인생사용법의 마지막 100장'이라는 별칭을 가진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을 출간합니다.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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