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빈 얄롬의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를 읽고
미국의 정신과 의사,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권위자이자 작가인 어빈 얄롬(Irvin David Yalom, 1931년생)의 1992년 소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When Nietzsche Wept>입니다. 얄롬이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읽어보는 건 처음이네요.
1882년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허구이지만 요제프 브로이어(Josef Breuer, 1842-1925),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루 살로메(Lou Salome, 1861-1937),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등 실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이 책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요제프 브로이어 박사와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가상의 만남을 통해 철학과 의학이 인간의 고통과 절망을 다루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라는 표제를 하고 있지만 정작 둘의 만남으로 수혜를 본 쪽은 요제프 브로이어 박사 쪽인 듯합니다.
무명의 철학자를 치료해 달라는 루 살로메의 편지를 계기로 브로이어는 니체를 만나게 됩니다. 자존심 강한 니체가 순순히 치료에 응할리 없습니다. 브로이어는 니체에게 철학으로 자신의 절망을 해결해 주면, 자신은 의학으로 니체의 고통을 치유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고 이로써 두 사람의 '거래'가 성사됩니다.
브로이어 박사는 니체에게 인간적으로 매료됩니다. 부드러운 음성을 가진 니체, 책에서 느껴지던 권위적이고 힘찬 니체와 '피와 살을 가진 니체'는 간극이 있었습니다.
니체가 대담하게 말하는 방식들! 상상해보라! 희망이 악 중에 최악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신은 죽었다! 진실은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오류! 진실의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념이다! 의사는 죽음의 권리를 박탈할 자격이 없다! 그는 니체의 말 하나하나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니체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_본문 가운데
브로이어 박사는 니체가 하는 모든 말에 경이감을 느끼고 니체가 누리는 수많은 자유ㅡ'집도 없고 의무도 없고 월급도 없고 양육할 자녀도 없고 스케줄도 없고 역할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는 삶ㅡ에 진지하게 의문을 품을 만큼 부러움을 느낍니다. 의학이 철학에 한 수 밀리는 분위기입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탄생을 예고하는 장면에서는 '그럴듯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심리적 수술이라? 정말 그럴듯하군." 브로이어는 감탄했다... 프로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신의 정신을 분석한다!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객관적이고 정통한 안내자가 있으면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_본문 가운데
니체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브로이어에게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삶인지, 자신이 원하는 삶인지에 대해 묻습니다. 당연히 아니죠. 브로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자신에게 부여된 삶을 살았음을, 그저 그 삶 속에 구겨 넣어진 채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그게 바로 불안의 일차원적인 원인입니다. 그런 압박을 느끼는 것은 살아보지 못한 삶으로 가슴이 터질 지경이기 때문인 거요. 시간은 똑딱똑딱 지나갑니다.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한 번도 자유를 외쳐본 적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게 얼마나 끔찍하겠소이까!" _본문 가운데 니체의 말
이쯤 되면 정신과 의사는 브로이어가 아닌 니체입니다.
성공한 의사이지만 멈출 수 없는 욕망과 중년의 갈등을 겪는 브로이어 박사에게 니체의 철학은 명약이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영원회귀 사상은 다른 어떤 책들에서 보다 이해하기 쉽게, 그것도 니체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으니 영광입니다.
"영원회귀란 당신이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순간마다 그 행위를 영원히 또한 기꺼이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취하지 않은 행동, 사산된 생각, 하지 않은 선택,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보지 못한 삶은 당신 내면에 영원히 부풀어 오른 채 남아 있어요." _본문 가운데 니체의 말
《보스턴 글로브》의 평을 빌려 이 작품을 한 줄로 설명하자면, '고증이 훌륭하면서도 풍부한 상상력이 가미된 지적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심리치료분야의 대가인 어빈 얄롬이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니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참고가 되기도 합니다.
2024.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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