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중단편을 모은 <보이지 않는 소장품 Die unsichtbare Sammlung>입니다. 당대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극찬한 작품들로 이 책에는 「아찔한 비밀 Brennendes Geheimnis(1911)」, 「불안 Angst(1913)」, 「세 번째 비둘기의 전설 Die Legende der dritten Taube(1916)」, 「모르는 여인의 편지 Brief einer Unbekannten(1922)」, 「어느 여인의 24시간 Vierundzwanzig Stunden aus dem Leben einer Frau(1925)」, 그리고 표제작인 「보이지 않는 소장품 Die unsichtbare Sammlung(1925)」까지 전체 여섯 편의 소설이 수록돼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발자크 평전>의 저자로 잘 알려진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기작부터 1930년대까지 작가로서의 전성기에 내놓은 중단편들을 한 번에 읽어볼 수 있게 해주는 반가운 책입니다.
표제작인 「보이지 않는 소장품(1925)」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연합군에 패배한 독일은 당시 장기간 전쟁으로 인한 국가적 빈곤과 인플레이션, 거기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는데 이 시기 일반 시민들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작중 화자가 베를린에서 손꼽히는 고(古)미술품 상점 주인을 찻간에서 우연히 만나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화자 역시 전쟁이 있기 전 그 상점에 종종 들러 고서 등을 구입하곤 했던 인연이 있습니다.
그 고미술품 상점 주인은 어려운 경제상황에 더이상 팔 물건이 없어 오래전부터 귀한 작품을 사들이기만 하던 한 수집가를 찾아갑니다. 뭔가 좋은 소장품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을 갖고 말이죠.
그러나 그는 그 수집가의 집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고 기괴하고도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손은 마치 살아 있는 것을 어루만지듯 다정하게 텅 비어 있는 작품집을 쓰다듬었습니다. 섬뜩하면서도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후 여러 해 동안 독일인의 얼굴이 이처럼 완벽하고 순수한 행복에 빛나는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p256)
귀한 미술품을 오랜 시간을 들여 사들이기만 한 그 수집가는 그 가운데 단 한 점도 되팔지 않았습니다. 시력을 잃게 되어 지금은 작품을 직접 보지 못하지만 이미 하나하나의 세밀한 특징까지 모두 기억하는 수집가는 고미술품 상점 주인에게 직접 소장품들을 소개하는데 이 장면에서 경외심마저 듭니다.
"선생이 방문한 덕에 난 대단히 기쁜 시간을 누렸소이다." (p257)
몇 시간에 걸친 작품 설명에도 늙은 수집가는 지치긴 커녕 점점 얼굴에 빛이 되살아납니다. 한참을 수집품들을 소개한 후 수집가는 고미술품 상점 주인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소개할 기회를 주어 감사했다며 인사를 건넵니다. 귀한 자식을 다른 사람들 앞에 자랑하는 부모의 심정이 이와 비슷할까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환한 얼굴이 살포시 우리의 역겨운 현실 세계 위로 솟아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쫓기듯 거리를 바삐 오가는 퉁명스러운 사람들 위에 둥둥 떠있던 광경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소장가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p259)
먹고살 궁리를 위해 일부러 수집가를 찾아 온 고미술품 상점 주인은 늙은 수집가를 보며 오래전 잊은 줄 알았던 작품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돌아갑니다. 전쟁 후 너도나도 힘들고 팍팍한 형편이지만 그 틈에서도 행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뭔가를 소장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인지, 아니면 쫓기듯 바삐 오가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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