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작가의 책 한 권을 읽고 그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는 즐거운 경험을 가끔 하게 됩니다. 이 책 역시 그런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행복하네요.
캐나다 출신 영국 작가 레이첼 커스크(Rachel Cusk, 1967-)의 장편소설 <두 번째 장소 Second Place>입니다. 2021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그 해 부커상 후보에 오른 이력이 있습니다. 레이첼 커스크는 이른바 '윤곽 3부작'으로 불리는 자전적 소설 <윤곽 Outline(2014)>, <환승 Transit(2016)>, <영광 Kudos(2018)>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들도 읽어봐야겠습니다.
<두 번째 장소>는 제퍼스라는 1인의 청자에게 말하듯 써내려간 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제퍼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으며 그에게 보내기 위해 쓴 편지도 아닙니다.
화자이자 소설의 주인공은 외딴 습지에 남편 토니와 함께 살고 있는 중년의 여성 작가 M입니다. 그녀가 화가 L을 자신의 집 별채로 초대하고 L이 여자친구 브렛과 함께 이곳을 찾아 머물다 가는 이야기가 전체 소설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살아갈까요? 이해되나요, 제퍼스? 나는 평생 자유를 갈망했지만 새끼발가락만큼도 자유롭지 못해요. (p15)
중년의 여성 작가 M에게 주어진 최대 화두는 자유입니다. M은 평생 자유를 갈망해 왔으며 그렇게 습지의 삶을 선택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몸부침 치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누군가를 통해 혹은 어떠한 상황을 통해 자유에 대한 돌파구를 찾길 바라고 있습니다.
나는 자유가 단순히 잠겨 있던 것을 풀어내고 갇혀 있던 것을 해방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만들어진 규칙에 끊임없이 복종하고 그것에 통달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배당금 같은 거였어요. (p62)
화가 L을 초대한 것 역시 그의 작품에서 느껴진 절대적 자유 때문이었습니다. L이 자신에게 자유에 관한 해답을 줄 것만 같았죠.
우리는 사생활을 지키면서 공존할 수 있도록 직감적으로 무언의 선을 지키며 살았어요. 하지만 L을 보자니, 더군다나 브렛을 보자니 우리 둥지에 뻐꾸기를 불러들인 것은 아닌지 의아해졌어요. (p72)
그러나 기대는 역시 실망과 단짝입니다. 화가 L과 그의 젊은 여자친구 브렛의 방문은 M에게 재난과도 같은 사건이 되고 맙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L이 M이 갈망하는 그 자유를 온전히 누리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진실은 현실이 우리의 해석을 넘어서는 곳에서 싹터요. 진정한 예술은 현실적이지 않은 것을 포착하고자 해요. 내 의견에 동의하나요, 제퍼스? (p272)
L의 방문 이후 M에게는 적잖은 변화의 움직임이 생깁니다. 자유라고 믿어온 삶의 구조가 처참히 무너져 내리고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립니다. M은 불안 속에 더욱 간절히 제퍼스를 찾고 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L과 그의 여자친구의 방문은 마치 M에게는 실패한 초대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M이 평생을 갈망하던 자유에 한 걸음 다가서게 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비록 M이 기대하던 방식은 아니지만 말이죠. 제퍼스에게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드러내며 이야기하는 동안 M이 조금씩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자각해 나가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재난이 우리를 해방해줄 수 있을까요, 제퍼스? 인간은 끔찍한 공격을 당해 고집스럽게 지켜온 정체성이 산산이 부서진 후에도 살아갈 수 있을까요? (p242)
고집이 산산이 부서진 후에만 알 수 있는 그것을 말이죠.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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