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에 비견되곤 하는 프랑스 소설가 레몽 라디게(Raymond Radiguet, 1903-1923)의 대표작 <육체의 악마 Le Diable au Corps>입니다. <육체의 악마>는 그가 10대 후반에 집필하고 요절하기 얼마 전인 1923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출간 직후 프랑스 문단의 열렬한 찬사를 받습니다.
사실 <육체의 악마>는 출판사 소개문에서 '문제작'이라 일컬을 만큼 당시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열여섯 살 소년과 참전 군인의 약혼자와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라는 점, 그리고 집필자 역시 겨우 17세 소년이라는 점이 그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논란을 잠재울 만큼 소설의 심리묘사와 인간에 대한 통찰이 탁월했기에 레몽 라디게는 일약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나는 많은 비난을 받을 참이다. 그러나 난들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p7) _첫 문장
<육체의 악마>는 1차 세계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며 주인공인 사춘기 10대 소년은 앞으로 서술할 내용이 비난거리가 될 것이라는 걸 미리 고백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4년 동안의 전쟁은 마음이 혼란스러운 소년들에게 긴 여름방학과도 같았음을 알아달라고 덧붙입니다. 비난하기 전 정상 참작을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마르트에게 사랑을 품게 되자 르네를 비롯하여 나의 부모, 누이들에 대한 애정도 식어 버렸다. (p36)
주인공은 아버지 지인의 딸인 마르트를 기차역에서 처음 보게 됩니다. 열여덟인 그녀는 이미 약혼한 상태로 약혼자는 전쟁터에 나가 있습니다. 얄궂게도 주인공 소년은 마르트에게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품게 되고 그렇게 사랑에 빠집니다.
<육체의 악마>라는 표제처럼 소설은 본능에 따라 변해가는 10대 소년의 불안정한 심리를 솔직하게 묘사해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함께 울고 있었다. 행복하기 때문이었다. 마르트는 내가 결혼을 말리지 않았다고 나를 나무랐다. 하지만 그랬다면 내가 고른 이 침대에 내가 누워 있을 수 있었을까?... 우리들의 행복을 죄악이라고 생각하기엔 나는 마르트를 너무나 사랑한다. (p73)
마르트의 신혼 살림을 보러 다니는데 주인공이 동행하게 되고 마르트가 남편과 사용할 침대도 골라줍니다. 그리고 둘은 그 침대에 누워 행복과 불행의 얄궂은 운명 앞에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어린 신부와 그녀를 사랑하는 2살 연하의 소년, 부도덕한 일이지만 두 사람을 덮어놓고 비난하긴 어렵습니다.
왜...
사랑이란 결국 두 사람의 이기주의로서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또한 거짓말로 존속하는 것이다. (p79)
진짜 예감은 우리 정신이 가 보지 못한 깊은 곳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때때로 그 예감이 우리에게 시키는 행위를 우리가 아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p183)
사랑에 빠진 감수성 풍부한 10대 소년은 <육체의 악마> 속에서 그야말로 시적이고 감동적인 문장들을 대거 풀어놓습니다.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 두 남녀 주인공은 결국 <육체의 악마>와 손을 잡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마지막까지ㅡ 비록 해피엔딩은 아니지만ㅡ 사랑하는 모습으로 퇴장합니다.
2025.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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