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렉 이건(Greg Egan) 「쿼런틴 Quarantine」을 읽고
이해는 안 되는데 재미있는 SF소설입니다. 이 책에 추천사를 쓴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한마디로 미친 책이다"라며 격찬을 쏟아냅니다. 바로 작품의 소재가 양자역학이기 때문인데 더 놀라운 건 33년 전인 1992년에 출간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하드 SF 르네상스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소설가 그렉 이건(Greg Egan, 1961)의 데뷔작 <쿼런틴 Quarantine>입니다.
작품 속 배경은 2060년으로 2034년 11월 15일 외계인들이 지구의 인류를 봉쇄하기 위해 지구를 거대한 막으로 에워싸는 사건이 일어난 '버블데이' 이후 30여 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더 이상 지구에서는 태양계 너머의 별을 볼 수 없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별다른 재앙 없이 30여 년이 흘러가고 2060년에 사립탐정인 주인공의 일상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뉴 홍콩'은 홍콩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 세운 망명 도시로 사립탐정인 주인공 닉은 이곳에서 중증 선천성 뇌손상 환자인 32세 로라 앤드루스 탈출 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버블데이'와 연관이 있음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지만 <쿼런틴>을 다 읽고도 명확히 이해되진 않습니다.
<쿼런틴>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을 통해 인간의 의식이 양자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설 하에 양자물리학과 인간의 자유 의지, 의식의 본질 같은 철학적 문제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몇십, 몇백만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것들을 수축시키고 있다고? 다른 항성들을? 다른 은하들을? 다른 생명체들을? '개연성들의 수를 대폭 줄이고 있다'고? 단지 관측하는 것만으로 우주를 난도질하고 있다고?" (p209)
우선 '버블'은 외계인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지구에서 인간들이 성능 좋은 기기로 우주를 관측하는 것만으로 가능성의 수축과 고갈이 일어나니 우주를 지키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죠. 지금까지 인간의 지각이 우주 대부분을 소멸시켰다는 것인데 <쿼런틴>에서는 이것을 '인생이란 다른 버전의 나 자신을 끊임없이 학살(p322)'하는 행위라고 표현합니다. 흠.
사실을 말하자면, '버블'은 결코 인류를 가뒀던 적이 없다. 단지 인류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너머에 무한대의 자유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제로 직면해야 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p403)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우주(p207)이며 그런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대다수의 가능성과 개연성을 소멸시켜버리는 우주라고 설명합니다.
<쿼런틴>의 서사를 이끌어간 가설이 혹시 실제라면, 양자 개념이 인간 실존을 밝혀줄 열쇠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2022년과 2023년에 연이어 양자 개념이 노벨상을 받은 것을 보면 머지않아 사이언스 픽션이 논픽션이 될 수도 있을까요.
"양자역학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과학 이론이에요. 파동함수의 수축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말예요... 양자역학은 지금까지 행해진 모든 검증 실험에 합격했어요. 방금 얘기한 '관측'이라고 불리는 특수한 과정을 받아들이는 한은 말이에요. 그리고 이 과정은 기타 물리법칙들과는 전혀 다른 원칙에 따라 움직여요." (p199)
양자역학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느낌으로 하는 학문이 아닐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봅니다.
그렉 이건이 이후에 발표한 여러편의 하드 SF소설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쉬운' 책으로 <쿼런틴>을 꼽는다고 하니 다른 책들은 손에 쥘 엄두도 못 내겠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평범한 일상으로 귀속되는 법이다. (p447)
마지막 문장입니다. 대우주적인 이야기도 결국 일상으로 귀결된다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결론이 마음에 듭니다. <쿼런틴> 덕분에 오랜만에 뇌가 찌릿찌릿한 신선한 자극을 받습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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