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스윔 「우주는 푸른 용: 매혹적인 우주의 창조 이야기」를 읽고
우주에 관한 책인 줄 알았는데 천주교 서적인 듯도 하고...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둘 다를 아우르는 '우주 신학'을 다룬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우주론을 가르치는 물리학자 브라이언 스윔(Brian Thomas Swimme, 1950)의 책 <우주는 푸른 용: 매혹적인 우주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책은 신학자인 토마스 베리 신부와 젊은 브라이언 스윔 박사가 우주 신학에 관해 하룻저녁에 나누는 짧은 대화로 구성됩니다.
지금까지 알던 우주와 신학의 범위를 뛰어넘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흥미롭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의 대화에 핵심이 이론이 되는 양자역학 때문이겠지요. 양자.
목차는 크게 1부 「하느님의 첫 계시, 우주」, 2부 「하느님의 창조물, 지구」, 3부 「빅뱅의 절정」으로 나뉩니다.
토마스 내가 우주를 푸른 용이라 부르는 이유는 마치 우리에 갇힌 개처럼 우주가 우리 손아귀에 있다는 착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p32)
비교 대상이 없는 단 하나의 우주는 언어로 가둬 둘 수 없는 대상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우주를 '푸른 용'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주는 그야말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우주를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고, 케임브리지 영어 사전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 별 행성 은하 등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물질'이라고 정의합니다. 즉, 누구도 우주를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습니다.
토마스 모든 것이 나오는 바로 그곳에서 오는 거죠. 원시 불덩어리가 나온 바로 그곳이요. 그곳은 공(空)의 영역, 실재의 신비스러운 질서인 동시에 만물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곳, 즉 무(無)죠. (p45)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에 대해 묻는 젊은 브라이언 스윔 박사에게 토마스 신부는 때에 맞춰서 자신 안에 존재하는 창조적인 힘이 나타날 것이라는 다소 모호한 답변을 합니다. 또한 그 창조적인 힘은 '공(空)'의 영역으로부터 나온다는 더 이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덧붙입니다. 공(空) 사상을 말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하네요.
스윔 박사 역시 토마스 신부의 설명에 "잠시 기다려 주세요..."라며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응을 보이고, 저는 일찌감치 집중의 끈을 놓쳤습니다. 공(空)...
토마스 맞아요.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아직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 안에 어떤 힘이 있는지 몰라요. 모든 것이 볼 수도 맛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우리의 잠재 영역, 즉 공(空) 안에 존재해요. 창조성을 어떻게 깨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 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력에 반응할 때 가능하죠. 이 인력의 활동은 별의 탄생처럼 우리를 어떤 존재가 되게 만들어요. 우리의 생명과 역동성은 이 인력에 반응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죠. (p62)
내용을 이해해보려고 집중해서 텍스트를 따라가는데 책갈피에서 네잎클로버ㅡ맞나?ㅡ를 발견합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인데 누군가 선물처럼 꽂아뒀네요. 마치 이 책 읽는 일에 행운을 빈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양자 점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약간의 지적 환희심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까이 매달린 수많은 작은 종의 일부가 충격을 받으면 그 공명을 주변 종을 통해 전파하고 그 전체는 이전과 전혀 다른 양자 상태가 만들어진다는 예로 설명할 수 있는데 달 앞에 서 있는 어떤 존재의 변화를 비유로 들어 부연하는 부분에서 좀 더 명확해집니다.
토마스 달과 사람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당신 상태는 변하는데 광자 상호작용을 한 만큼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당신 몸의 입자들이 어떤 영향을 흡수해 버린 거죠. 그런 측면에서 그 입자들과 당신 몸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 거죠. 달빛으로 이곳저곳에 공명하는 인간이 된 거죠. (p106)
토마스 신부는 우리가 창조성과 헌신, 노동, 우주를 인식하는 기쁨, 지구를 놀랍게 발전시키는 일로 모든 것을 창조한 우주에 보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책의 표제로 사용한 '푸른 용'인 우주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심오한 말로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용은 불로 가득 차 있어요. 비록 용은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용의 불이에요. 놀랍고 매혹적인 용, 창조적이고, 섬세하고, 타오르면서, 치유하는 불꽃인 우주의 용이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p184) 3부 가운데
<우주는 푸른 용>을 다 읽고나서 간단하게 핵심을 정리해 내기 어려운 걸 보면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아... 음... 오...! 그런 느낌은 있습니다. 언어로 설명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죠. 저의 인식 수준과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언젠가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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