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스 노터봄(Cees Nooteboom) 「필립과 다른 사람들」을 읽고
작가들의 첫 소설은 대체로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합니다. 그래서 어떤 '좋은' 작가를 알게 되면 그의 첫 작품을 찾아 읽게 됩니다.
네덜란드 작가 세스 노터봄(Cees Nooteboom, 1933.7.31.~)이 1955년 22살의 나이에 처음 발표한 소설 <필립과 다른 사람들 Philiip en de anderen> 역시 작가의 삶이 반영된 작품입니다. 주인공 필립의 1인칭 시점으로 그려지는 소설은 10대 소년의 모험과 방랑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랑의 시작과 끝을 도와주는 인물로 범상치 않은 아웃사이더이자 필립의 삼촌인 안토닌 알렉산더가 있습니다.
안토닌 알렉산더 삼촌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p13)_첫 문장
필립이 10살 무렵 처음 만난 알렉산더 삼촌은 그때 이미 칠순 정도의 노인이었습니다. 삼촌은 잡동사니가 꽉 들어찬 덩치만 큰 집에서 혼자 살며 대부분의 시간에 음악을 들으며 사는 괴벽스러운 인물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단 한 가지 의미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이상향으로의 귀환이지... 신이란 두렵기 이를 데 없는 대상인데, 그건 신이 완전무결하기 때문이야. 완전 무결한 것, 낯선 것만큼 인간이 두려워하는 건 없지... 약속해라, 신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을 다 하겠노라고." (p31-34)
그러나 역시 범상치 않은 아이였던 필립은 6년 뒤 다시 찾은 삼촌 집에서 2년여를 머물며 많은 걸 배웁니다. 알렉산더 삼촌의 깊은 연륜은 필립의 내면에 있는 방랑의 충동을 깨우고 이후 필립이 유럽 각지를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필립은 마침내 삼촌의 승낙을 얻어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유럽 각처로 여행을 떠납니다. 모험을 하는 동안 필립은 '다른 사람들'을 수없이 만나고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필립과 다른 사람들>에 담아냅니다.
재미있는 건 그 사람들과 이야기가 모두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인데 아를의 광장에서ㅡ느닷없이ㅡ함께 춤을 춘 재클린이라는 여성이 필립에게 한 말만 봐도 그렇습니다. 필립이 불행을 갖다 주는 존재이니 절대 다시 돌아오지 말라며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조숙한 애늙은이였어. 넌 더는 경험할 일이 하나도 없어. 한갓 회상할 일만 남았을 뿐이지. 넌 더 만나야 할 사람도 없어. 이별을 나누기 위한 예외적인 만남을 제외하곤." (p50)
필립이 만난 '다른 사람들'의 다소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장차 세스 노터봄의 작가로서의 인생의 토대가 되어주었을까요. 기이한 이야기들과 함께 필립은 모험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이 방랑은 알렉산더 삼촌이 말한 신이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일환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그녀의 행적을 찾아 나선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자아임을 자각하면서... 길, 나는 그동안 수많은 길들을 봤고 몸소 밟아 왔기에, 이젠 그 길이라는 게 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p128-129)
나그네 필립에게 중국인 소녀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여행은 자신의 완전한 자아를 추적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이런 필립의 여정은 안토니오 타부키(Antonio Tabucchi)의 <인도 야상곡>에서 인도에서 실종된 친구 사비에르를 찾아 나선 여정과 닮아있습니다.
마침내 방랑을 끝내고 다시 알렉산더 삼촌을 찾아간 필립은 무엇을 가지고 갔을까요. 알렉산더 삼촌은 이제 80세에 이르렀겠네요. 조카이자 제자의 모험 이후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을지 궁금합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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