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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오정희 「중국인 거리 Chinatown」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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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중국인 거리 Chinatown」를 읽고


책갈피에 꽂힌 엽서를 보니 2017년 1월에 선물 받은 책입니다. 분량이 많지 않아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 읽고 인상적인 문체에 반해 작가가 누군지 검색해 봤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가인 오정희(1947년생)의 1979년 단편 <중국인 거리 Chinatown>입니다. 작가 본인의 유년기 경험을 기초로 한 자전적 소설로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후반 인천 연안부두 인근의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는 동네에, 바로 그들과 인접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 중국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아이들뿐이었다. 어른들은 무관심하게, 그러나 경멸하는 어조로 '뙈놈들'이라고 말했다.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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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거리>는 당시 가난한 피난민들이 모여든 거칠고 어두컴컴한 지역으로 이곳에 사는 아홉살 소녀가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아이들은 가난에 지쳐 밀가루를 훔치고 화차의 석탄을 훔쳐 간식으로 바꿔먹으며 각박한 일상을 꾸역꾸역 버텨나갑니다. 동심이나 순수함은 이곳 아이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중국인, 미군, 피난민이 뒤엉킨 차이나타운에서는 눈치 빠르고 조숙한 아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왜 아저씨는 이발만 열심히 하지 잡담을 하느냔 말예요. 나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정말 접시처럼 발랑 되바라진 애구나, 못 쓰겠어... 아저씨는 손모가지에 가위부터 들고 나와 이발쟁이가 됐단 말예요? (p56)

 

이발사가 해준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자 주인공은 비속어까지 섞어 쓰며 불만을 표출하고 그런 자신을 되바라졌다며 몰아세우는 이발사에게 한 마디도 지지않고 대거리를 합니다. 이발소에 있는 사람들이 이 '되바라진' 아홉 살 소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자 주인공 소녀는 어깨가 으쓱하고 올라가기까지 갑니다. 


<중국인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가 어둠을 살아가고 아이들도 세상을 그렇게 배워갑니다.

 

'양공주'인 매기 언니는 같이 살던 흑인 미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딸 제니는 고아원에 맡겨지고 고양이는 자기가 낳은 새끼 7마리를 잡아먹고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수녀가 죽고 아이를 더 낳으면 몸이 상해 죽을 것 같은 엄마는 또 임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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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수채에 쭈그리고 앉아 으윽으윽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임신의 징후였다. 나는 처음으로 여자의 동물적인 삶에 대해 동정했다. 어머니의 구역질에는 그렇게 비통하고 처절한 데가 있었다. 또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머니는 죽게 될 것이다. (p76)

 

이처럼 많은 생명들의 죽음이 자리한 곳이 <중국인 거리>입니다. 우연인지 주인공의 눈에 들어온 죽음은 모두 여성, 동물도 암컷입니다. 주인공은 여자의 '동물적인 삶'을 동정하는 마음을 품게 되고 그렇게 자신도 <중국인 거리>에서 여자가 되어갑니다. 

 

 

인생이란...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나 뒤를 이을 어떤 적절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다만 복잡하고 분명치 않은 색채로 뒤범벅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의 수없이 다가올 내일들을 뭉뚱거릴 한마디의 말을 찾을 수 있을까. (p94)

 

열 살을 갓 넘긴 어린 소녀의 단상이라기엔 너무 무거운 독백입니다. <중국인 거리>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고 어린아이다운 어떤 모습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일찌감치 거친 어른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습니다.  

 

한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여러 조건들 가운데 시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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