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을 읽고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p9)
첫 문장에 반해서 고르는 책이 종종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첫 문장부터 홀린 듯 읽어 내려갑니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튀르키예의 소설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 1952)이 1994년 출간한 다섯 번째 소설 <새로운 인생 Yeni Hayat>입니다. 무겁지 않고, 희망에 차 있고, 즐거운 서사를 다룬 작품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인생>은 역설적이게도 상징으로 가득한 매우 철학적인 소설입니다. 믿고 보는 작가의 또 하나의 명작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인생>의 주인공 오스만은 이스탄불의 평범한 공대생으로 어느 날 눈에 들어온 여학생 자난이 들고 다니던 책을 구해 읽고 그 책에 사로잡힙니다. 오스만에게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자난의 소개로 이 책의 또 다른 추종자 메흐메트를 찾아가지만 그는 그건 그냥 책일 뿐이라며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강한 확신을 가진 오스만은 새로운 인생을 향한 모험을 떠나기로 합니다.
"뭣 때문에 새로운 인생의 존재를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책이 내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느꼈거든." (p41)
오스만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래전 메흐메트가 그러했듯 튀르키예 방방곡곡을 향한 버스 여행에 나섭니다. 수많은 버스에 올라타고 또 수많은 버스에서 내립니다.(p67) 버스로 상징되는 우여곡절 많은 오스만의 여정이 과연 오스만이 기대하는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까요.
책 한 권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게 돼버린 오스만이 염려되기까지 합니다.
1994년 출간한 이 소설은 튀르키예에 쏟아져 들어오는 서구적 가치에 관한 오르한 파묵의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그 책'과 '새로운 세계'는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합니다. 오르한 파묵은 이를 위해 다양한 장치들을 숨겨놓고 추리적 기법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나린 박사가 반대하는 것은 빛, 진실, 사실을 잃어버린 책들인데, 더욱이 그런 책들은 빛, 진실, 그리고 사실들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유한한 세계 속에서도 우리에게 천국의 마법과 평온을 약속하는 이 책들은, '거대 음모'의 앞잡이들이 찍어 내는 것이었다. (p180)
책이라는 것과 텍스트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또 그렇기 때문에 악용될 소지가 있는지를 경고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한두 권의 책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며 자신과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그러한 책에 더 쉽게 현혹될 수 있음을 말이죠.
그러니 독자여, 오직 이 세계가 잔인한 곳이라는 사실만을 믿어라. 서양 문명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 소설이라는 이 새로운 장난감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이 외국에서 들여온 장난감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배회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p322)
새로운 세계로 가는 여정의 막바지에 오스만은 자신을 닮은 존재와 불현듯 마주칩니다. 바로 무거운 짐과 사람을 싣고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말의 눈 속에서 입니다.
갈기는 땀투성이였다. 분노에 차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짐이 너무나 무겁고 오르기가 힘겨워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다. 말의 슬프고 고뇌에 찬 커다란 눈 속에서 불현듯 나 자신을 보았다. (p366)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은 결국 어떤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일까요.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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