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 리(Harper Lee) 「파수꾼」을 읽고
하퍼 리(Harper Lee, 1926-2016)의 베스트셀러 <앵무새 죽이기>의 속편이자 '전작'인 2015년 장편소설 <파수꾼 Go Set a Watchman>입니다.
일생동안 단 하나의 작품만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 하퍼 리의 55년 만의 소설 <파수꾼>은 신작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파수꾼>이 1960년 출간된 <앵무새 죽이기> 보다 3년 앞서 집필되었기 때문인데 당시 출판사의 제안과 작가의 의지로 출판하지 않기로 한 <파수꾼>이 느닷없이 저자 사망 1년 전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작가의 출판 동의 여부 등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파수꾼> 역시 출간 직후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됩니다.
<앵무새 죽이기>가 1950년대 중반 미국을 배경으로 쓰여졌고 <파수꾼>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을 그리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두 작품 모두 동일한데 주인공 진 루이즈 핀치는 <파수꾼>에서는 20대 성인으로,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72세로 그려집니다.
20세기 중반 흑인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이 벌어지던 당시 미국에서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는 억울하게 기소된 흑인 청년을 변호해 무죄를 끌어내는 등 평등의 가치를 옹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동해 왔습니다.
소책자 표지에 식인종 니그로 그림이 있었다. 진 루이즈는 소책자를 펴 들고 아버지 의자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뒤 죽은 쥐의 꼬리를 잡듯 소책자릐 한 귀퉁이를 잡아 들고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고모 앞에 그것을 디밀었다. "네 아버지 거야." (p144)
그러나 20여년이 흐른 후 <파수꾼>에서 진 루이즈 핀치의 눈에 들어온 아버지의 모습은 실망과 분노를 넘어 존경하던 아버지를 증오의 대상으로까지 여기게 합니다. 바로 인종차별주의자인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진 루이즈는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 아버지가 읽던 흑인인종차별을 다룬 소책자를 버립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다. 따뜻하고 편안한 과거의 아주 작은 음성이었다. "여러분, 제가 이 세상에서 믿는 구호가 하나 있다면,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권을. 특권은 없습니다." (p154)
과거 모든 이들의 <파수꾼>과도 같았던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특권 없는 사회를 외치던 아버지는 어쩌다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곁을 내어준 것인지 진 루이즈는 안타까움을 넘어 슬픔마저 느낍니다.
누군가의 진실에 따라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가 살아온 인생의 가치를 우리가 믿어 왔다면, 그런 그가 우리를 실망시킨다면,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경계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를 파산시키지. 그래서 내가거의 제정신이 아닌가 봐.... (p154)
어릴 적부터 믿고 의지하고 삶의 본보기로 삼아온 아버지의 몰락은 진 루이즈 핀치를 무너지게 합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이런 부분을 마주쳤을 때 자녀는 부모를 넘어서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제 애티커스 핀치의 딸이 아닌 진 루이즈 핀치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파수꾼>에서 진 루이즈 핀치는 자신에게 파수꾼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그녀가 이 세상을 위한 <파수꾼>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녀와 관련된 중요 사건은 2백 년 전에 시작되어 현대 역사상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과 가장 가혹한 평화도 파괴시키지 못한 자존심이 강한 사회에서 펼쳐졌고, 이제는 어떤 전쟁도 평화도 구할 수 없을 문명의 쇠퇴기로 되돌아와 개인의 장에서 다시 펼쳐질 참이었다. (p173)
<파수꾼>과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이 곳곳으로 번지던 20세기 중반 하퍼 리가 세상에 대해 얼마나 큰 고민을 안고 살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실제로도 하퍼 리의 부친이 변호사로 활동한 것을 보면 불평등한 법과 사회를 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 세계에서 인종차별이 일어나고 있지만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 같은 문학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오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025.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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