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로 호세 셀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읽고
스페인 내전 직후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소재로 한 사회문학임과 동시에 살인마의 범죄 고백을 다룬 범죄심리 소설입니다. 1989년 스페인 소설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카밀로 호세 셀라(Camilo Jose Cela, 1916-2002)가 1942년 출간한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La Familia de Pascual Duarte>입니다.
이 작품은 저자의 데뷔작으로 당시 소재의 불온함과 표현의 잔인함으로 출판 금지 조치를 당하지만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둡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이라는 표제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룬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 연상되는데 과연 한 개인의 일생에 있어 가족 공동체는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을까요. 피해자 겸 가해자로서 말이죠.
소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은 1939년 알멘드랄레호의 어느 약국에서 발견된 희대의 살인마 파스쿠알 두아르테의 원고를 누군가가 옮겨 쓴 것으로 왜 그 약국에서 원고뭉치가 발견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소설은 '옮긴이'의 서문, 그리고 파스쿠알 두아르테의 이 원고에 대한 입장문이 차례로 나오고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937년 2월 15일 바다오스 감옥에서 사형수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메리다에 사는 돈 호아킨 바레라 로페스에게 편지를 씁니다.
사면을 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너무도 악했고 그런 본능에 저항하기에 나는 너무도 연약했기 때문이지요. 하늘의 책에 쓰여 있는 대로 되길 바랄 뿐입니다. (p21)_두아르테의 편지 가운데
편지 내용에는 사면을 구하진 않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 너무나 비극적이고 열악했음을 스스로를 변론하듯 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를 낱낱이 알게 된 독자로서는... 일말의 공감이나 연민도 갖기 어렵습니다.
선생님, 비록 그렇게 될 소지가 없진 않지만, 나는 나쁜 놈은 아니올시다. 우리 모든 인간은 매한가지 가죽을 쓰고 태어나지만, 우리가 성장할 때 운명은 마치 우리를 밀랍 인형 다루듯 주물러 대고 또 여러 오솔길을 통해 죽음이라는 동일한 종말로 향하게 하면서 즐거워하지요. (p25)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의 첫 문장입니다. 앞선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 두아르테는 열악한 시골에서 태어나 평생을 학대와 증오 속에 살아왔습니다. '광야의 뙤약볕을 견디며 자기 몸을 보호하려는 야생짐승'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삶을 묘사합니다. 연이은 살인을 저지르며 두아르테는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과거에 저지른 잔인한 행동들을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산티아고 신부도 내게 위안이 된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지요... 계속해서 글을 쓰겠습니다. 글을 쓰지 않고 한 달을 보내는 것은 불안이 습관화된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평온한 것이니까요. (p123-124)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감옥에서 넉달 넘게 회고록을 쓰는 중입니다. 과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또 상세히 고백하는 것으로 '위안'을 얻는 불안한 사형수의 심리가 잘 드러납니다.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아 몇 페이지를 건너뛰었습니다.
모범수였던 나는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ㅡ이것이 내 불행이었죠.ㅡ석방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문을 열어 주었고 나를 세상의 모든 사악함 앞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놓았지요. (p149-150)
두아르테는 살인죄로 3년ㅡ겨우.. 당시 스페인의 불안한 정세가 반영된 것일까요ㅡ 을 복역하고 모범수로 가석방됩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에 나와 이전보다 더 잔인한 죄를 짓고 다시 수감되어 사형을 언도받습니다. 그가 모범수였다는 것에 집중하게 되네요. 스스로도 모범수로 가석방된 것이 자신의 불행이었다고 말합니다.
악마는 우리의 고통을 눈치채고는 자신만만합니다. 본능은 거짓말하지 않으니까요. 불행은 즐겁고 정겹습니다... 우리는 이미 악에 물들어 버린 겁니다. 해결책도, 되돌리기 위한 수단도 없는 법... 끔찍하죠. (p173)
악에 물들어 버린 인간 파스쿠알 두아르테는 마침내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최대의 비극, 그리고 두아르테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잔인하고 얄굿은 그의 숙명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내전 직후의 스페인에서 드물지 않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25.3.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암 큰스님 법어집 「그건 내 부처가 아니다」를 읽고 (0) | 2025.03.12 |
---|---|
디노 부차티의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을 읽고 (2) | 2025.03.11 |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를 읽고 (1) | 2025.03.09 |
하퍼 리(Harper Lee) 「파수꾼」을 읽고 (8) | 2025.03.08 |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을 읽고 (0) | 2025.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