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매카시의 「로드 The Road」를 읽고
핵전쟁 혹은 대규모 재앙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세상,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 살아남았다...면 그것이 과연 행운일까요 비극일까요.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1933-2023)가 2006년 발표한 소설 <로드 The Road>에서는 황폐해진 세상에 살아남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생존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의 종말, 인류 대멸종, 아니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의 또 다른 시작을 다룬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코맥 매카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책은 이듬해인 2007년 퓰리처상을 수상합니다.
남자는 깜깜한 숲에서 잠을 깼다. 밤의 한기를 느끼자 손을 뻗어 옆에서 자는 아이를 더듬었다. 밤은 어둠 이상으로 어두웠고, 낮도 하루가 다르게 잿빛이 짙어졌다... 발을 질질 끌며 재를 헤치고 나아갔다.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다 (p.7-10)
작품의 표제 <로드>는 폐허가 된 세상에서 한 남자와 그의 아들이 배고픔과 추위, 위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여정을 상징합니다. 잿빛이 짙어진다, 재를 헤치고, 같은 묘사를 보면 핵전쟁이나 화산 분출 같은 게 있었던 것일까요.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어디론가를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역시 가장 큰 위협은 다른 생존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들의 <로드>에서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면을 수차례 목도하게 됩니다.
남자는 소년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사는 게 아주 안 좋니?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나는 그래도 우리가 아직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우린 아직 여기 있잖아. 그래요. 넌 그게 별로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구나. 괜찮죠, 뭐. (p.303)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살아남게된 남자는 거의 매일 밤 어둠 속에 누워 죽은 자들을 부러워(p.260)했습니다. 만약 혼자였다면 남자의 생각이나 대응은 또 달랐겠지만 자신의 아들을 두고는 희망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시큰둥한 아들에게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하며 자신의 마음가짐도 다잡습니다.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었소. 내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어.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 당신이 맨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시오. (p.192)
디스토피아적인 세상에서 아들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고 그래서 누굴 만나도 냉정하게 외면하는 남자와 달리 어린 소년은 다른 생존자들에게 자꾸만 손을 내밀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결국 한 발 물러서서 길에서 만난 비쩍 마른 노인에게 먹을 걸 건네주고 잠시 대화를 나눕니다.
남자의 아들인 어린 소년에게서 '불'을 보았다고 말하는 노인이 전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만약 맨 마지막에 남은 사람이라면...
<로드>라는 영화를 한 편 본 느낌입니다. 비슷한 영화를 본 기억 때문인지.
2025.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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