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붉은 인간의 최후 Secondhand Time」를 읽고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 1948-)가 2013년 출간한 논픽션, <붉은 인간의 최후>입니다. 이 책은 저자가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으로 20세기말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후를 살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영문판 제목은 <Secondhand Time: The Last of the Soviets>로 붕괴한 과거의 유산을 짊어진 채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의 내적 갈등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특유의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 기법이 이 작품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공산주의 이념 아래 살아온 이들ㅡ붉은 인간ㅡ이 겪는 자본주의의 충격, 상실, 혼란을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시절의 삶과 이별하는 중이다. 나는 사회주의 연극에 출현했던 모든 등장인물의 의견을 정직하게 듣기 위해 애쓰고 있다... (p.9) _첫 문장
<붉은 인간의 최후>의 첫 장은 「어느 가담자의 수기」라는 제목의 서문입니다. 소비에트의 공산주의가 물러가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새로운 이념으로 들어서던 시기에 대해서는 역사에서 배우지만 그 속에 살고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당시를 살았던 잊힐 뻔한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목소리를 이 책에 담아냅니다.
그 삶이 어떠했든 간에 그건 우리의 삶이었다. 나는 가정 속에 나타난 사회주의 또는 내부적으로 나타난 사회주의의 역사적 파편과 부스러기를 모아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마음속에서 살았는지에 대해 말이다. 나는 항상 인간... 하나의 인간이라는 작은 공간에 매료되곤 한다. 사실 모든 역사가 그 작은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니까. (p.10-11)
<붉은 인간의 최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붉은색으로 장식된 열 편의 이야기', 그리고 '붉은색으로 장식되지 않은 열 편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전자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향수와 그 시절 집단적 경험에 대한 목소리이고 후자는 새로운 시대, 그러니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시대의 관점에서의 혼란과 고뇌 희망과 좌절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부모님은 그 상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고, 급변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어요. 제 남동생이 방과 후에 세차를 하거나 지하철에서 껌이나 잡동사니를 팔았는데,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지요. 아버지는 학자였어요. 박사요! 소비에트의 엘리트였다고요! 상점에서 햄을 팔기 시작했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어요. 그때 가격표를 본 거죠!! 그렇게 우리 인생에 자본주의가 들어왔어요... (p.237)
소비에트 체제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했던 사람들의 추락과 혼란은 상상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을 겁니다. 소비에트의 학자였던 한 남성은 이제 학령기의 아들이 지하철에서 껌을 팔아 벌어들이는 수익보다 못한 경제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엘리트 계층에서 소외계층으로, 그가 이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건 이처럼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 시대... 나의... 위대한 시대! 그때는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지 않았어. (p.245)
공산주의 시대의 향수를 이야기하는 또다른 목소리입니다. 누군가는 그때의 민초들을 '노예'였다고 표현하며 그들을 새로운 이념에 적응시기키 위해 설교까지 하고 나서지만 그 시대에 태어나 그 시대에 속했던 또 다른 누군가는 소비에트는 진정 위대한 시절이었다고 울부짖습니다.
부모님 같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어요. 러시아식 자본주의... 젊고 낯 두꺼운 그 자본주의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건 우리 부모님들이 그 자본주의를 주문한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확실해요. 왜냐하면 그건 제가 주문한 거니까요. (p.495)
<붉은 인간의 최후>에서 변화에 빠르게 적응한 것은 역시 젊은 층입니다. 그들 중 대다수가 자본주의를 흥미로워하고 민주주의 이념의 자유를 반깁니다. 시대와 체제가 변했지만 여전히 과거의 유산 속에서 의미를 찾는 붉은색으로 장식된 이야기들 역시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떠나면 자연스럽게 색이 옅어지겠지요.
2025.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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