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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조르조 바사니의 「성벽 안에서: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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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바사니의 「성벽 안에서: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를 읽고


이탈리아의 소설가 조르조 바사니(Georgio Bassani, 1916-2000)의  소설집 <성벽 안에서: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Dentro le mura: Cinque storie ferraresi>입니다.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은 1956년 이탈리아 최고의 문학상인 스트레가상을 수상합니다.

 

출간 당시 제목은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로 조르조 바사니가 청년기를 보낸 이탈리아 북부 페라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섯 편 모두 특정한 사건이나 역사적 상황을 다루기보다는 나치 체제에서의 유대인 박해, 정치적 갈등과 학살이 벌어지는 시대의 이면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꾸려가는 일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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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안에서>에 수록된 단편 중 특히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이 백미로 꼽힙니다.

 

나치 독일에 의해 1943년 가을 경 부헨발트로 추방된 이탈리아 페라라의 유대인ㅡ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죽었으리라 추정ㅡ 183명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청년 제오 요즈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1945년 8월, 그가 돌아왔을 때 당연히 페라라에서 환대를 받지만 그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흔히들 가스실에서 모두 끝장나고 말았으리라 여겼던, 유대인 공동체의 희생자 백팔십삼 명 중 유일한 생존자 제오 요즈가 페라라에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이 도시에서 누구도 그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p.107)

 

제오 요즈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2년여 만에 다시 찾은 고향에서 그를 기다리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뒤로하고 재건을 꿈꾸는 페라라에서 유대인이란 과연 어떤 존재일지 생각해 봅니다.

 

제오 요즈를 매몰차게 내 쫓은것이나 마찬가지인 페라라와 그는 화해할 수 있을까요.

 

"제오 요즈?"를 반복했다. 그러고 피식, 다시 웃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추모 명판을 다시 만들어야 할 텐데, 저기에 헌정된 이름, 저 한구석을 차지한 제오 요즈가 다름 아닌 '나'거든요, 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p.111-112)

 

거리의 회당 입구에 한 일꾼이 유대인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기념 명판을 붙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제오 요즈의 이름도 있습니다. 그는 그러나 자신은 이렇게 살아있다며 명판을 다시 제작하는 수고를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죽지 않고 살아돌아와서 미안하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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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그의 것이었다. 그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했다. 모든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어야 했다. 가능한 한 빨리. (p.121)

 

지방구역이 차지한 제오 요즈 집안의 건물에서 그는 마치 손님처럼 방 하나를 빌려 머물면서 소유권을 되찾고자 합니다. 나의 고향이고 나의 집인데 그 무엇도 자신과 관계없는 듯 페라라와 묘한 역학관계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리고 제오 요즈는 변해가고, 페라라 사람들은 그를 피하기 시작합니다. 

 

 

홍수로 인해 방대하게 인근 들판에 범람했던 큰 강과 마찬가지로, 세상은 이제 자신의 강바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요점이었다. (p.150)

 

운 좋게 살아남은 자의 숙명.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은 제오 요즈를 통해 얄궂은 생의 역설, 인간 사회의 비정함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25.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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