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길먼의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을 읽고
영미권 최고 권위의 추리소설 상인 《에드거 상》 그랜드마스터를 수상한 미국 작가 도로시 길먼(Dorothy Edith Gilman, 1923-2012)의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 The Elusive Mrs. Polifax>입니다. 이 소설은 1966년부터 2000년까지 35년간 14권이 출간된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The Mrs. Polifax series)'의 세 번째 시리즈물로 1971년 작품입니다.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는 CIA의 최고령 스파이로 활동하는 60대 괴짜 에밀리 폴리팩스 부인(Mrs. Emily Polifax)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에서 폴리팩스 부인의 작전지역은 냉전 시기 감시가 삼엄한 공산국가 동유럽의 불가리아입니다.
새벽 2시, 부인은 막 성배라도 전달받은 사람처럼 황홀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불가리아에 간다니, 정말, 정말 신나네요!" (p.21)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 1부와 2부에서 멕시코와 터키에서의 임무를 무사히 마친 폴리팩스 부인에게 세 번째 지령이 시달됩니다. 공산국가인 불가리아 지하조직원들의 탈출을 도와줄 위조 여권 8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두근두근. 폴리팩스 부인은 상기된 얼굴로 새 임무를 유쾌하게 받아 듭니다.
부인은 생각했다. 이 나이야말로 인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편안한 삶에 안주하던 시간은 충분히 겪었고, 무사안일한 인생이라는 것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은 바꿀 수 있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p.51)
편안한 일상을 뒤에 남겨두고 CIA의 괴짜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은 불가리아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남편과는 8년 전 사별하고 약간의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도 생각했던 폴리팩스 부인은 어릴 때 꿈이었던 스파이가 '얼떨결'에 되면서 60대에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폴리팩스 부인은 모자에 달린 작은 새 둥지에 불법 여권 여덟 개를 숨긴 채 불가리아에 도착합니다. 자신의 모자에 불법 여권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려 애쓰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작전을 수행합니다.
'간단'하게 지하조직의 리더를 만나 여권만 전달하면 되는데 일이 간단하게 풀릴 리 없습니다. 기상천외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고 스릴 넘치는 상황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여기 더해 책의 자간도 넓고 줄간격도 넓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갑니다.
"겉보기에 우리 두 사람은 참 다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참 비슷한 존재입니다. 미국인 친구, 당신이 불가리아에서 태어나기만 했더라도 우리 둘이서 세상을 바꾸었을 텐데요." (p.309)
불가리아에서 저항운동을 하는 지하조직 리더 찬코의 말입니다. 국적이나 성별, 외모나 나이를 초월한 우정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을 폴리팩스 부인에게 고백합니다. 역시 사람은 자신과 유사한 누군가를 직감적으로 알아보는군요.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에서는 60대에 생의 전성기를 맞이한 폴리팩스 부인을 통해 무사안일하고 몸이 편안한 삶이 과연 행복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폴리팩스 부인에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요(NO)'인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오늘만큼은 데비도 갈데없는 부랑아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활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됐으니까, 하고 흐뭇해하던 폴리팩스 부인은 어째서 사람들은 다들 몸이 편한 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 통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p.301)
2025.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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