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몽 루셀의 「로쿠스 솔루스」를 읽고
프랑스의 음악가이자 소설가 레몽 루셀(Raymond Roussel, 1877-1933)의 장편소설 <로쿠스 솔루스 Locus Solus>입니다. 레몽 루셀은 프랑스 잠재문학실험실 울리포(OuLiPo) 작가들의 책을 읽다 알게 됐는데 프랑스문학사에서 기기묘묘한 작품 이력으로 '광기'의 작가로 통한다고 합니다.
이 책 <로쿠스 솔루스>는 1913년 출간된 작품으로 어느 발명가의 거대한 정원을 배경으로 진기한 구경거리와 그에 얽힌 사연을 소재로하고 있습니다. 제목 <로쿠스 솔루스 Locus Solus>는 '외딴곳'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소설 속 광대한 빌라 정원의 이름입니다. 이 소설은 소위 '상상력의 집합체'로 교훈이나 실용적 지식 같은 함의가 배제된 이야기 자체의 순수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주인공 마르시알 캉트렐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44세의 과학자이자 발명가로 <로쿠스 솔루스> 정원의 소유자입니다. 4월 어느 날 캉트렐은 화자를 포함한 가까운 친구 몇몇을 이곳에 초대합니다. 캉트렐은 친구들에게 <로쿠스 솔루스>를 소개하는데 그 내용이 이 책 7장에 걸쳐 펼쳐집니다.
캉트렐은 과학에 인생의 전부를 바친 사람으로 작업 과정에 생기는 물질적 어려움은 막대한 재산을 쏟아 해결해 냅니다. 레몽 루셀의 집안 역시 당대 프랑스에서 전설적인 부를 쌓았다고 하는데, 캉트렐과 루셀을 보면 상상력은 물질적 여유에서 시작되는 건가요.
<로쿠스 솔루스>에는 기기묘묘한 발명품을 비롯한 진기한 볼거리가 가득합니다. 2장에서는 치아로 만든 모자이크작품이 소개됩니다. 고통 없이 치아를 뽑는 기구를 발명하고 그 덕분에 캉트렐에게 이를 뽑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결과물인 뽑힌 치아로 만든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날씨를 예측해 이동하는 비행기구ㅡ역시 발명품ㅡ가 해냅니다.
이후 선생은 예술작품을 산출하기 위해 무슨 질료를 사용할지 고민했다. 섬세한 모자이크만이 기구의 까다롭고도 잦은 왕복에 안성맞춤인 도전 과제일 듯 싶었다... 실행에 옮길 때마다 그것은 매번 훌륭한 결과를 낳은 터였다. _본문 가운데
3장에는 신비한 용액으로 가득 찬 거대한 다이아몬드 모양 수조 속에서 자유롭게 숨쉬고 헤엄치는 고양이와 머리카락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무용수가 나옵니다. 이 부분에서 데미안 허스트(Damien Steven Hirst)의 기이한 설치미술 작품ㅡ포름알데히드에 넣은 박제된 동물들을 유리진열장에 넣어둔ㅡ을 이 연상되네요.
캉트렐이 콩덱렌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그 동물은 털을 모두 뽑아버린 진짜 고양이였다. 아쿠아미칸스는 특별한 산소를 주입한 덕분에... 고양이도 물속에 그토록 오래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다. _본문 가운데
4장에서는 냉기가 도는 유리집 안에서 생전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여덟 명의 시체를 보여줍니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연상되기도 하고, H.P.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소설 「냉기」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레몽 루셀이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조수가 여덟 명의 죽은 사람에게 비탈륨 막대를 집어넣거나 빼는 일을 계속했고, 필요한 경우 한 사람의 움직임을 정지시키기 조금 전에 다른 한 사람을 소생시킴으로써 장면들이 끊김 없이 연속되도록 했다. _본문 가운데
캉트렐의 <로쿠스 솔루스> 정원에 대한 7장에 걸친 소개가 끝이 나고 드디어 그들은 '즐거운 저녁식사'자리로 이동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공유하고 즐겁게 모여 먹고 마시는, 데카메론(Decameron)식 세계관으로 마무리되는군요.
2025.1.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로시 길먼의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 The Elusive Mrs. Pollifax」을 읽고 (0) | 2025.01.07 |
---|---|
타네하시 코츠의 「세상과 나 사이 Between The World and Me」를 읽고 (0) | 2025.01.06 |
윌리엄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 Cake and Ale」를 읽고 (0) | 2025.01.04 |
조너선 프랜즌의 「인생 수정 The Corrections」을 읽고 (3) | 2025.01.03 |
오자와 다케토시의 「1년 뒤 오늘을 마지막 날로 정해두었습니다」를 읽고 (0) | 2025.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