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 The Pale Horse」을 읽고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작가 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 1879-1925)의 <창백한 말 The Pale Horse> 입니다. 1909년 출간한 일기 형식의 자전적 소설로 러시아 혁명가로 활동한 시기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보리스 사빈코프는 1905년 당시 모스크바 총독이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암살 후 사건의 전말을 <테러리스트의 수기>에 상세히 기록합니다. 이 책 <창백한 말>은 <테러리스트의 수기>를 축약하여 소설화한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역사에 대해 무지한 저로서는 <창백한 말>을 읽기 위한 배경지식을 갖추는데 약간의 시간을 들여야 했습니다. 보리스 사빈코프라는 혁명가에 대한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어제 저녁 나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나는 모스크바를 사랑한다. 여기는 내 고향이다. 나는 영국 왕의 붉은 인장과 랜스도운 경의 서명이 있는 여권을 갖고 있다. (p.11)
<창백한 말>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조지 오브라이언이 3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조지는 사회주의자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압제로부터 민중을 구하기 위해 테러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이번 그의 목표는 모스크바 총독 암살이며 이 일을 위해 그는 영국 여권을 갖고, 러시아 '관광객' 자격으로 입국했습니다.
"나는 모스크바를 사랑한다. 여기는 내 고향이다."
오 하나님, 굽어살피소서! 우리는 아이들처럼 약하고 믿음이 모자라, 그래서 우리는 칼을 들지.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고 겁에 질렸기 때문에 칼을 드는 거야. (p.41)
조지 오브라이언은 단원 바냐, 표도르, 하인리히, 에르나와 함께 총독 암살 계획을 이행합니다. 그러나 조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뇌합니다. 암살단을 이끌며 겉으로는 냉철한 킬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는 두려움과 불안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9월 27일. 나는 사는 것이 지겹다. 하루가, 일주일이, 일 년이 단조롭게 늘어진다. 오늘은 내일과 같고 어제는 오늘과 같다. 삶은 좁은 길 같다. 돌로 된 굴뚝의 검은 숲. (p.176)
<창백한 말>에 쓰인 표현들은 소설이나 산문보다 시에 가깝습니다. 보리스 사빈코프의 글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는데 단번에 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루하다. 나는 밤을 기다린다. 밤은 나의 시간이다. 망각과 평화의 시간. (p.179)
나는 사랑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한순간에 세상은 저주스럽고 공허한 것이 되어버렸다. 모두 거짓이고 모두 헛수고이다. (p.182)
<창백한 말>에는 로맨스도 있습니다. 조지 오브라이언을 마음에 두고 있는 에르나, 그리고 조지 오브라이언이 오랫동안 사랑해 온 여인 엘레나. 조지에게 주어진 공적인 임무와 사랑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구성하는 전부입니다.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그는 살아야만 합니다.
시대의 무거운 사명을 짊어진 혁명가의 삶 속에 드려진 깊고 어두운 고뇌를 담은 시적인 문체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보리스 사빈코프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네요.
2024.12.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데리코 아사트의 「다음 사람을 죽여라 Kill The Next One」를 읽고 (3) | 2024.12.31 |
---|---|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 My Brilliant Friend」을 읽고 (0) | 2024.12.30 |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 Nickel and Dimed」을 읽고 (2) | 2024.12.28 |
미하일 불가코프의 「불가코프 중단편집」을 읽고 (5) | 2024.12.27 |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티끌 같은 나 One of Many」를 읽고 (9) | 2024.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