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의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를 읽고
제목에서부터 실존과 관련한 서글픔이 배어나는 책입니다. 국내에서는 <냉정과 열정 사이>로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장편소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입니다. 에쿠니 가오리는 이 작품에서 80대 노인 세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들을 둘러싼 남겨진 이들에 관해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왜 죽었으며, 남겨진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의 배경은 12월의 마지막 밤, 어느 호텔 라운지입니다. 이곳에 80대 노인 세 명이 모였습니다. 치사코, 간지, 츠토무, 이 세 사람은 오랜 시간 인연을 맺어온 친구들로 이날 함께 엽총으로 목숨을 끊습니다.
바에서 마지막 맥주를 마시며 치사코는 "그 시절엔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는데."(p.8) 라고 말합니다. 나머지 두 친구는 유쾌한 농담으로 대구 합니다. 눈앞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편안한 분위기입니다.
모든 것이 끝나면 그곳에 있는 건 각기 다른 세 가지 죽음이다.
이 날의 사건은 TV뉴스에 방송되고 세 사람의 유족과 친구, 지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만의 추측으로 그들을 추모할 뿐입니다. 예상치 못한, 그리고 너무나 충격적인 죽음을 계기로 남겨진 자들의 일상은 변합니다.
이미 충분히 살았습니다.
치사코의 유서 속 한 문장이 더 없이 쓸쓸하게 들립니다. 과연 '충분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삶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치사코의 마지막 순간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유족을 위로하려는 치사코의 조심스러움이 느껴집니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는 장 구분 없이 여러 등장인물의 이야기들이 시간 순서도 없이 뒤섞여 전개됩니다. 메모지를 옆에 두고 관계도를 그려가며 읽습니다.
왜 하필이면 엽총이었을까요.
몇 가지 선택지 중에서 엽총을 선택한 건 츠토무였다. 한 방 쾅 때리면 이 세상에는 노인도 살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이 떠올릴지도 모르고.. 라고 말하며 웃었다.
초고령 사회 일본과 고령 사회 대한민국, 두 나라가 가진 명암은 비슷합니다.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는 노인에 대한 인식을 재설정하는 작품입니다. 노인은 지나간 세대, 혹은 사회가 그저 돌보아야 할 약자라는 시각에서 그들도 한 사회의 구성원이며 존중받아야 할 존엄한 인간임을 자각하게 해 줍니다.
청년, 중년, 노년을 떠나 모두를 한 개인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지닌 사람으로 보아야 함을 말이죠.
나는 돈은 있지만,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곳엔 이제 하나도 없어.
<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부분에서 잠시 멈출 것입니다... 시기가 다를 뿐 누군가가 겪은 일은 언젠가 내게도 닥칠 일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납니다. 생과 사 앞에서 겸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2024.12.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맥스웰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 Waiting for the Barbarians」를 읽고 (0) | 2024.12.10 |
---|---|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A Woman's Story」를 읽고 (0) | 2024.12.09 |
페터 한트케 중편소설 「어느 작가의 오후」를 읽고 (1) | 2024.12.07 |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고 (1) | 2024.12.06 |
파스칼 키냐르의 「하룻낮의 행복」을 읽고 (2) | 2024.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