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 중편소설 「어느 작가의 오후」를 읽고
<관객모독>으로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작가,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의 소설 <어느 작가의 오후 Nachmittag eines Schriftstellers>입니다. 198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가란 무엇인가?'에 관해 쓴 페터 한트케만의 작가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월의 오후, 그날의 작업을 마친 '작가'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작가는 작가다운 시선으로 평범하고 사소한 것,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과 사람들을 지각하고 묘사해 나갑니다.
나의 오후는 작업이 끝나는 순간 시작된다!
매일매일 그날 분의 글을 쓰는 작가는 12월의 어느 날도 여느 날처럼 집필을 끝내고 자신의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느 작가의 오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작가'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차분히 앉아 추억에 잠기는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가장 사랑스러운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작가들은 작품에 빠져 지내다보면 현실감각을 잃기 쉽습니다. 외출 전 잠시동안 작가는 바깥세상의 존재 여부에 대한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여름의 푸른 나뭇잎은 얼마나 다양하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겨울의 회색 가지는 또 얼마나 다양한가? 전자는 멀리서도 구별할 수 있지만, 후자는 가까이에서만 분별할 수 있다.
잎이 떨어지고 생기를 잃은 앙상한 겨울나무에서 다채로움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그것에서도 색깔을 찾아냅니다. 다만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어느 작가의 오후>의 배경이 되는 12월의 어느 오후는 첫눈이 내렸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사건 없이 지나갑니다. 작가의 눈에 들어온 첫눈은 이렇게 묘사됩니다.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다>와 <시작한다>는 그에게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실이라 할 수 없는 거의 같은 개념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건 자체보다 기다림이 더 위력적이었다.
산책하는 작가의 눈에 오랫동안 흔들리고 있는 그네 하나가 들어옵니다. 눈바람을 맞고 흔들리는 그네에서 작가는 자신을 인지합니다.
"공허, 나의 기본 원칙. 공허, 나의 애인."
작가의 공허함에서 깊이가 남다른 무게가 느껴집니다. 그것은 작가, 문학, 작품, 글쓰기, 단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에서 비롯된 공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현듯 떠오른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책상 앞으로 달려가는 작가의 모습에서 '작가란 무엇인가?'에 관해, 작가의 '공허'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2024.12.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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