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사건 L'evenement」을 읽고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바로 그 일이었을 거다." (p.19)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으로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1940-)의 고백록 <사건 L'evenement>입니다. 2000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등단 이래 끊임없이 자신을 고백해 온 저자도 <사건>은 끝끝내 이야기하기 고통스러웠다고 말합니다. 바로 20대 초반, 당시는 불법이던 임신중절 경험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럽게 써낸 글은 활자에도 그 아픔이 서려있어 읽기도 힘겹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에르노가 이 고백록을 쓰는 것을 자신의 '강력한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건>에는 임신중절에 관한 체험이 샅샅이, 지나치리만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법적으로 금지된 일을, 그것도 결혼을 하지않은 여성이, 이제 갓 스무살을 넘은 대학생이 경험해야 했다는 것은 참혹하리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다음 날 아침, 어제 오후에 책가방을 메고 나섰던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전부 그대로였다. 그리고 거의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바로 이런 사소한 것에서 우리는 삶의 혼돈이 시작되고 있음을 가늠한다. _본문 가운데
그녀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 사건을 다룬 책을 찾아보지만 도움이 될만한 자료는 없습니다. 소설에서 임신중절이 언급되긴 하지만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책은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스스로 <사건>을 집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겁니다.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_본문 가운데
겨우 8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자이지만 이 책 <사건>은 말그대로 사건입니다. 2000년이 되어 이제 더이상 임신중절이 불법이 되지 않는 시대가 되어서야 빛을 본 그 사건은 저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다양한 형태의 충격을 안겨줍니다.
그리고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_본문 가운데
언젠가 한 작가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하길, 스스로 작가가 되고자 한 적은 결코 없으며 '그 일'이 나를 찾아왔다라고 말하는 걸 어느 책에서 읽은적이 있습니다. 아니 에르노에게도 '그 일'과 '그 사건'이 그렇게 찾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2024.1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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