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의 「런던 스케치 London Observed」를 읽고
<런던 스케치 London Observed>라는 제목만으로도 벌써 호감이 가는 책입니다. 생의 어느 한 시기에 그곳에 살았다는 이유로 런던이라는 단어만 봐도 아는 체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제가.
이 책은 200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1919-2013)의 단편집으로 런던에 관련된 18편의 짧은 스케치와 이야기가 수록돼 있습니다. 1992년 출간된 작품으로 원작 역시 <London Observed: Stories & Sketches>로 직관적인 표제를 하고 있습니다.
단편집이라도 작가가 진지한 고민 끝에 의도를 갖고 차례를 정했겠지만 저는 늘 그렇듯 읽고 싶은 것 부터 골라 읽으렵니다. 어떤 이야기부터 읽을까 설레는 맘으로 목차를 훑습니다.
「지하철을 변호하며」라는 소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런던의 지하철에 대해 도리스 레싱은 "나는 지하철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p.116)"라고 말하며 자신의 이러한 생각이 '도발적인 고백'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역사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은 지붕보다 높다. 하늘 속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태양과 바람과 비가 빌딩을 거치지 않고 내린다. 상쾌하다. _「지하철을 변호하며」 가운데
도리스 레싱이 지금 서 있는 역은 앞 뒤 맥락으로 미뤄볼 때 런던의 킬번 역(Kilburn)을 말하는 듯합니다. 주빌리 라인(Jubilee)이면서, 런던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킬번과 웨스트 햄스테드 지역에 있는 플랫폼이 지붕보다 높은 역. 역사 플랫폼을 더없이 서정적으로 묘사한 이 부분이 마음에 듭니다.
런던 지하철에는 역사 직원들이 작은 칠판에 매일 어떤 문구를 적어놓는데 도리스 레싱이 <런던 스케치>를 집필하던 1990년대 초반에도 그랬나봅니다. 요즘도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 #londonundergroundquotes 로 매일 런던 지하철역에 놓인 화이트보드에 쓴 그날의 어록들이 올라오는데 개인적으로 시큰둥한 표현들이 제 유머코드와 잘 맞습니다.
한 달 전 직원들이 승객들에게 생각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칠판에 깨끗한 흰 분필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왜 그리 자주 고장 나는지 궁금하시죠? 저희가 알려드리죠! 그건 에스컬레이터가 낡아서 자주 고장 나기 때문이지요. 미안합니다! 멋진 하루 보내시기를!" 냉소적이면서 잔인하기도 한, 완벽한 런던식 유머로 차 있는 이 메시지로 인해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지고 긴 층계를 걸어 내려갈 준비를 한다. _「지하철을 변호하며」 가운데
에스컬레이터가 자주 고장나고, 대부분 화장실은 잠겨있고, 계단이 너무 많고, 지하철 어떤 칸에는 창문이 없고, 그래서 지하철에서 내리면 얼굴에 검댕이 가득하고, 너무 좁아 키 큰 사람 둘이 마주 앉으면 무릎이 닿을 정도라도 어딘가 런던 지하철에는 귀여운 면이 있습니다. 특히 깊은 터널을 운행하는 지붕이 동그란 형태의 튜브 타입 차량은 체구는 작지만 연륜 있는 장인의 포스가 느껴져 사랑(?)스럽기까지 합니다.
도리스 레싱처럼 저 역시 런던 지하철을 변호하는 변호인측 인사인 듯한데 좋은 말로 아날로그 감성이라고 해두겠습니다.
2024.1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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