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집 「작가 El hacedor」를 읽고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한 비운의 위대한 작가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1986)가 늘 언급됩니다. 그런 그가 남긴 만년기의 대표 작품집이 바로 이 책 <작가 El hacedor>입니다. 1960년 출간된 책으로 25편의 단상과 50편의 시가 수록돼 있습니다.
후반부 역자의 작품 해설 「인간 보르헤스가 쓴 작품」에서는 이 책이 보르헤스 역시 위대한 작가 이전에 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라며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 <작가 El hacedor>는 1950년대 말 보르헤스가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후 처음 발표한 작품으로 그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보르헤스 자신을 잘 담고 있습니다. 특히 표제작인 「작가」에서 고통스러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처절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우주가 점점 그를 버렸다. 밤하늘의 별이 사라졌고, 발밑에 있는 대지가 불안정해졌다. 모든 것이 아스라해지고 뒤섞였다. 자신이 눈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비명을 질렀다. _「작가 EL HACEDOR」 가운데
어릴 적 아시아에 서식하는 용맹한 줄무늬 호랑이를 숭배한 화자는 호랑이를 예찬하며 자랍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사 책에서 본 호랑이를 기억하는 화자는 꿈속에서라도 호랑이를 만나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아, 무능력한 나! 꿈은 결코 내가 갈망하던 맹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호랑이가 등장은 한다. 그러나 박제된 호랑이, 허약한 호랑이... 호랑이, 너무 단명하는 호랑이, 개나 새를 닮은 호랑이가. _「호랑이 꿈 DREAMTIGERS」 가운데
갈망하던 맹수, 무능력한 나의 꿈, 보르헤스의 탄식에 공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수록된 작품들 하나하나 와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고 제 삶의 경험이 더 쌓이면 공감하는 문장들도 늘어나겠지요.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가 누군가가 죽을 때 최후를 맞이하는 사물들에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사물, 아니 무한한 숫자의 사물들이 한 인간이 죽을 때마다 함께 죽는 것이다. _「증인 EL TESTICO」 가운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마지막 장 「에필로그 EPILOGO」에서 이 책을 놓고 신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자들에게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관한 가이드를 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 작품을 '이 잡다한 글들'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가 어떤 작품들보다 애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출판사에 넘긴 책들 중에서 이것만큼 개인적인 책, 이것만큼 뒤죽박죽이고 무질서한 잡문록은 또 없었다. 성찰과 가필이 많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게 일어난 일은 별로 없고, 독서만 많이 했다. _ 「에필로그 EPILOGO」 가운데
보르헤스의 팬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이 <작가 El hacedor>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2024.11. 씀.
'[책] 소설 시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르난 디아스의 「먼 곳에서」를 읽고 (8) | 2024.11.10 |
---|---|
이문열이 엮은 「죽음의 미학」을 읽고 (2) | 2024.11.09 |
페터 한트케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을 읽고 (0) | 2024.11.07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읽고 (2) | 2024.11.06 |
로알드 달의 「클로드의 개」를 읽고 (2) | 2024.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