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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시 독후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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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읽고 


18세기 프랑스 군인이자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Xavier de Maistre, 1763-1852)의 여행담 <내 방 여행하는 법 Voyage autour de ma chambre>입니다. 이 책은 1794년 출간되었으며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불법 결투에 가담한 혐으로 42일간 가택연금을 당하던 기간에 쓴 작품입니다. 표제 그대로 그자비에는 자신의 방 구석구석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에 관한 담론을 적어 내려 갑니다.

 

<내 방 여행하는 법>은 이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알랭 드 보통(Alanin de Botton), 윌키 콜린스(Wilkie Collins) 등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인용되고 암시됩니다. 저도 알랭 드 보통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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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연금당한 처지이지만 그자비에는 유머를 잃지 않습니다. <내 방 여행하는 법> 곳곳에서 그의 기발함과 상상력, 위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번역 역시 18세기 당시의 어투를 살리려고 애쓴 흔적이 엿보입니다.

 

그대들이여, 예 있으니 읽어 주시기를! 나는 42일간의 내 방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참이다. 이 여행으로 나는 흥미로운 것을 보았고 여정 내내 즐거웠으니 책으로 엮으면 어떨까 싶었다. _본문 가운데

 

이 책은 그자비에가 집필한 후 출간하지 않고 두던 것을 형 조셉(Joseph de Maistre)이 출판합니다. 덕분에 2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흥미로운 여행담을 읽어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자비에는 본론에 앞서 자신을 향한 오해ㅡ오해가 있을지도 모를ㅡ를 미리 언급하고 해명합니다. 가택 연금으로 어쩔 수 없이 '내 방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이 여행을 궁리하고 있었음을 말이죠. 가택 연금 덕분에 예정보다 일찍 여행을 떠났을 뿐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나마 <내 방 여행하는 법>이라는 책의 위신을 세워줍니다.

 

그자비에는 꽤 섬세한 성격을 가졌음이 분명합니다. 

 

 

의자란 얼마나 훌륭한 가구인가. 사유하는 인간에게 이보다 유용한 물건은 없으리라.(...) 벽난로 불이 활활 잘 타오르고 내 손에 책과 펜만 있으면 지루할 짬이 어디 있으랴. _본문 가운데

 

그는 방을 여행할 때 직선을 따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비스듬히 문을 향해 출발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행 중 안락의자를 만나면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 앉습니다. <내 방 여행하는 법>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관광지(?)가 '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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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방을 통해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끌어내다니, 그자비에는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책에서 밝히고 있듯 책과 펜만 있으면 지루할 틈 없는 그는 천상 작가입니다. 

 

귀족 가문 출신의 그자비에는 자신의 화려한 방을 보며 거리에서 가끔 마주치는 불우한 이들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 부질없는 화려함은 다 무엇인가! 의자 여섯 개, 탁자 두 개, 책상 한 개, 거울 한 개라니! 참으로 허영이 넘친다. _본문 가운데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 그들은 나를 방에 가두는 게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세상의 부귀영화를 간직한 이 멋진 공간에서 말이지? 쥐를 광에 가두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_본문 가운데

 

그자비에는 <내 방 여행하는 법>에서 철학적인 질문도 적잖이 던집니다. 내 방 여행을 통해 육체와 영혼, 지상과 천상에 동시에 존재하는 법을 알기 위해 영혼의 여행을 시도했고 그 과정이 무척이나 기뻤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42일간의 가택 연금이 끝난 것에 대해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죠. 

 

이 책은 도입부에서는 가볍고 유쾌한 에세이처럼 다가와서는 결국 묵직한 철학을 던져주고 갑니다. 후대의 명성 있는 작가와 철학자들이 18세기에 쓰인 이 여행담을 지속해서 들춰보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2024.1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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